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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Jan 06. 2019

히말라야에서 가장 뜨거운 커플


추위에 몸을 뒤척이다 잠에서 깼다. 목이 칼칼하다. 밤새 통나무 틈새로 불어 온 강바람에 감기가 든 모양이다. 창을 열었다. 강은 세차게 흐르고, 해는 새벽 하늘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트레커 몇 명이 숙소를 나서는 게 보였다. 야외 세면장으로 나가 코를 훌쩍이며 세수를 했다. 


“브렛이랑 엘리 곧 떠난대. 우리도 7시쯤 가자.” 

식당 테라스에 앉자마자 더스틴이 말했다. 나는 오믈렛을 먹으며 안나푸르나 산행 안내도를 읽었다. 안나푸르나 산행을 할 때는 되도록 일찍 길을 나서래. 오전 6시, 늦어도 8시 전. 내가 말했다. 말 되네. 그래야 해가 아직 뜨겁지 않을 때 걸을 수 있잖아. 구름도 많이 안 껴서 경치도 좋을 거고. 더스틴이 말했다. 


히말라야의 아침식사


“준비됐어?” 

커다란 배낭으로 무장한 엘리가 테라스로 와서 물었다. 브렛이 엘리를 뒤따랐다. 

“방에 가서 배낭만 가지고 나올게.” 

우리는 얼른 손을 털고 방으로 갔다. 다시 테라스로 나와 보니 엘리와 브렛이 언성을 높이고 있다. 뭐야, 왜 그래? 


“마시면 안 된다니까? 병에 든 물만 마셔야 해. 아니면 정수제로 정화하고 마시던가.” 

브렛이 말했다. 

“왜 마시면 안 돼? 난 여기 현지인처럼 생활하려고 온 거야. 네팔 사람들은 잘만 마시잖아? 아까 주인아주머니도 마시던데 뭐.” 

“현지인은 현지인이지. 현지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여기 물을 마셔서 면역력이 강해져 있다고. 넌 아냐. 괜히 탈 나서 고생하지 말고 정수제 써.” 


엘리가 시무룩하게 배낭을 멨다. 내 물 마실래? 어제 정수해 놓은 물이 담긴 병을 엘리에게 내밀었다. 됐어, 괜찮아. 우리는 각자의 배낭을 메고 마당을 나와 흙길을 걸었다. 아직 한참 밑자락이라 그런지, 산봉우리 같은 건 잘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거인의 발등 위를 걷는 기분이다. 어느 정도 걸으니 짝꿍이 재구성됐다. 속도가 빠른 더스틴과 브렛이 저만치 앞서가고, 엘리와 나는 한참 뒤처져서 걸었다. 엘리는 짐이 많아서 느리고, 나는 짐은 깃털같이 가벼우나 그저 태생이 느리다. 


엘리와 나


“너는 왜 안나푸르나에 왔어?” 

내가 물었다. 

“음…. 작년에 부모님이 여기 오셨었거든. 너무 좋다는 말을 1년 내내 하셔서, 꼭 와보고 싶었어.” 


“그런데 짐을 왜 이렇게 많이 들고 왔어? 포카라나 카트만두 숙소에서 짐 맡아주는데.” 

“얼마나 있을지 몰라서. 난 될 수 있으면 오래 머물다 갈 거야. 속도는 신경 안 쓰고 천천히, 되도록 오랫동안 걸으려고. 그래서 필요할 것 같은 짐을 다 가지고 왔어.” 


엘리의 배낭은 내 것의 네 배는 됐다. 그 커다란 배낭에도 차마 집어넣지 못한 침낭이 배낭 아래로 댕글댕글 달려있다. 오른쪽 옆에 매달린 쇠 주전자가 덜그럭 대며 우리 발걸음에 장단을 맞췄다. 


“어이. 여기서 쉬다 가자.” 

기다리고 있던 더스틴과 브렛이 엘리와 나를 불렀다. 길가에 있는 작은 찻집이었다. 누가 더 땀을 많이 흘리나 내기라도 하듯 번질번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던 우리는 뜨거운 밀크티로 주문을 통일했다. 더워 죽겠는데 차가 당긴다니 웃긴다. 더스틴이 말했다. 아, 내가 읽었는데, 차가운 음료보다 뜨거운 차가 갈증 해소에 더 도움이 된데. 흡수가 빨라서. 브렛이 말했다. 주인아저씨가 밀크티 네 잔을 가져다줬다. 차에서 나온 하얀 김이 얼굴에 확 끼쳤다. 후 후 불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맛있다. 딱 좋다. 브렛 말이 맞는 것 같다. 뜨거운 차가 혈관 속으로 재빠르게 타고 들어가 온몸에 퍼지는 기분. 사우나를 하는 기분. 테이블에 놓인 각설탕 두 개를 찻잔에 퐁당 빠뜨렸다. 다시 한 모금. 음. 달달하니 좋다. 


“나의 아름다운 로레나.”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자의 목소리. 또 저런다…. 얼굴이 너무 작아 마치 금발의 가발을 쓰고 있는 것 같은 남자. 크고 마른 손으로 아까부터 옆에 앉은 여자를 쓰담 쓰담. 차 한 모금 마시고 또 쓰담 쓰담. 그리고 터져 나오는 탄성과 찬미. 


“어디서 왔어?” 

커플의 애정행각에 다들 불편하게 곁눈질만 하고 있던 참에, 브렛이 남자에게 물었다. 

“베를린.” 

남자의 이름은 헨드릭이었다. 헨드릭은 우리 쪽을 슬쩍 보더니 다시 로레나인지 뭔지 하는 여자를 바라봤다. 한참 빠졌군. 


“오 베를린. 거기 정말 가고 싶은데. 베를린 생활비 비싸?” 

더스틴이 물었다. 


“음…. 아니 그렇게 비싸지 않아. 싸게 살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 이렇게 큰 팔뚝만 한 케밥도 3 유로면 살 수 있고….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할 만한 도시야. 난 베를린에서 미술을 하거든.” 

“오?” 

내가 외쳤다. 


“나의 사랑스러운 로레나는….” 

헨드릭이 다시 로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레나는 교사가 되려고 준비 중이야. 우리 로레나는 정말 바쁜데, 잠깐 쉴 틈이 생겨서 내가 얼른 인도 가는 티켓 두 장을 사버렸어. 헤헤.” 

“아 인도 갔었어? 우리도 네팔 오기 전에 인도 여행했는데. 너흰 어땠어 인도?” 

내가 물었다. 


“인도…. 인도는 3년 전에도 갔었어. 로레나 말고 다른 여자친구랑…. 그때의 인도는 끔찍했지…. 아마 같이 간 사람 때문에 더 그랬을 거야. 지금은 이렇게 아름다운 로레나가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아니 그래서 이번에 어땠냐니까? 되물으려다 말았다. 뭐라고 되묻던 헨드릭의 결론은 로레나일 터다. 헨드릭과 로레나는 마치 이 광활한 히말라야 산맥 아래 오직 둘만 존재하는 양, 서로를 끈적하게 바라보며 손을 어루만졌다. 


“로레나와 함께라면 무슨 일이든 괜찮아. 여기 오기 전에 정말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 

“무슨 일?” 

브렛이 되물었다. 


“원래 일주일 전부터 트레킹을 하기로 되어있었어. 그런데 도둑을 맞아서 이제야 온 거야.” 

“도둑?” 

더스틴이 물었다. 

“응. 카트만두에서. 길을 물어보고 있었는데, 보니까 누가 배낭 안에 든 여권이랑 돈뭉치를 털어 갔더라고. 안나푸르나 등산 허가증도 사라지고.” 


“뭐? 그래서?” 

내가 물었다. 

“안나푸르나 등산 허가증을 다시 받아야 했는데 그러려면 여권이 필요하잖아. 그런데 여권은 도둑맞았고. 돈은 600달러 정도 사라졌고.” 

“600달러!” 

내가 소리쳤다. 너무 놀라 혈관으로 스며든 차가 다시 튀어나올 뻔했다. 


“도둑맞은 날은 우리도 정말 황당했어. 하지만…. 나에겐 로레나가 있잖아? 점점 괜찮아졌어. 문제를 해결하느라 카트만두에 더 오래 머무는 바람에 좋은 친구들도 생기고. 사람들이 정말 많이 도와줬거든. …. 아, 존! 카트만두에 가면 존이라는 친구를 꼭 찾아봐.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 


로레나가 사랑스럽다는 듯 헨드릭을 바라봤다. 헨드릭이 다시 한 번 로레나의 짧은 밤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브렛과 엘리, 더스틴과 나는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뭐니 쟤네…. 그놈의 로레나 타령은 좀 빼면 말을 못 하나. 그리고,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도 아니고. 카트만두같이 복잡한 데서 존을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나는 남은 밀크티를 입에 털어 넣었다. 바닥 쪽은 설탕이 뭉쳐 많이 달았다. 여하간 존경스러운 커플이다. 600달러면 네팔을 한 달 여행하고도 남는 돈인데. 거기에 여권까지 잃어버리고 저렇게 담담할 수 있다니. 포카라 식당에서 고작 만 원을 손해 보고, 사흘이 지난 지금에도 그 일을 곱씹어보고 있는 내 얘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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