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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Jan 13. 2019

별 인간이 다 있다


“난 여기서 멈출게. 천천히 가야 하는데 너무 많이 온 것 같아.”

엘리가 말했다. 작은 마을이 앞에 보였다. 우리는 조금 더 걸어 게르묵 마을까지 가기로 했다. 둘이 같이 온 거 아니야? 브렛에게 물었다. 아니. 어제 베시사하르 검문소에서 처음 만났어. 고집 있는 애야. 어제부터 계속 저 소리더라고. 자기는 천천히 걸을 거라고.


게르묵 마을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가 다 되어 있었다. 마당으로 가니 트레커 대여섯 명이 웃통을 벗고 한가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다. 세상에 모든 땀은 다 흘린 것처럼 덥다. 작은 나무통 같은 샤워실로 가 샤워를 했다. 단 5분 찬물에 몸을 적셨을 뿐인데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기분이 어때? 브렛이 물었다. 어메이징. 내가 말했다. 석양 사이로 불어오는 산바람이 고양이 털처럼 간지럽다.


자리에 앉으며 자동으로 밀크티를 한 잔 주문했다. 내 앞에서 웃통 벗은 남자 하나가 뭐라고 떠들고 있다. 짙은 밤색 머리가 정돈되지 않은 턱수염과 꽤 잘 어울린다. 가슴에 털이 참 많군, 생각하고 있는데, 듣자 하니 하는 얘기는 가슴 털보다 더 흥미롭다.


“…. 내 머리통에 총을 들이댔어. 파리에 있는 우리 동네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여행하면서 죽을 뻔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야. 인도가 위험하다, 동남아가 위험하다, 말이 많지만, 오히려 죽을 뻔했던 건 우리 동네였다니까.”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이름은 조세프였다.


걷다 만난 당나귀 무리
강에서 물놀이를 하는 네팔 사람들


“그런 일을 겪으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돼? 막 생의 아름다움을 깨닫나? 영화 같은 거 보면 그렇잖아. 어떻게, 전공이라도 바꿨어?”

더스틴의 말에 다들 실실 웃었다. 전공을 바꾸긴 무슨. 뭘 했더라 그날. 그냥 집에 돌아가서 소파에 누워 TV 보면서 맥주 마셨어. 내 말의 포인트는, 여행을 가건 동네에 처박혀 있건 위험한 건 마찬가지라는 거야. 그냥 재수가 없으면 죽는 거지. 여행이 위험해서 죽는 게 아니고.


“…. 그래서, 여행을 얼마나 한 거야?”

내가 물었다. 3년 전 콜롬비아, 작년 베트남…. 시공간을 넘나드는 조세프의 여행담은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음…. 다 합치면 5년?”

“5년?!”

6개월 여행 간다고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온 우리는 억울해서 살겠나.


“크루즈에서 일을 했거든. 그럼 돈도 벌면서 여행을 좀 오래 할 수 있지.”

“크루즈에서는 무슨 일을 했는데?”

더스틴이 물었다.

“와인 서빙. 와인 서빙하는 일에 프랑스 남자라고 하면 면접도 안 보고 그냥 뽑아. 크루즈에 있다, 캐나다에 오래 머물기도 하고, 다른 데 여행하기도 하고. 그러고 산 지 5년 정도 지났네."


별 인간이 다 있다. 사는 건 정말 제 각각이다. 대학 가고 취직하고 시집가고 애 낳고. 한 길만 있다고 굳게 믿고 살아온 지난 스물몇 해 간의 나의 인생이 억울하고 비통해, 잠시 통나무 샤워실에 홀로 들어가 울고 싶다.


“난 베트남이 제일 좋았어.”

포가 말했다. 세미 단발의 금발 머리를 하나로 묶은 파란 눈의 포. 베트남 사람들이 쟤만 보면 쌀국수(pho)랑 이름이 똑같다고 맨날 놀렸어. 조세프가 말했다. 둘이 베트남도 같이 여행했어? 내가 물었다. 응. 둘이 사귀는 사이는 아니라며. 어떻게 만났어?


“인터넷에서.”

포가 말했다.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프랑스에는 여행 동행자 구하는 사이트가 있거든. 베트남 같이 갈 사람을 찾다가 서로 연락해서 만난 거야.”

조세프가 말을 이었다. 정말 특이하다. 그렇게 만나서 여행하는 사람도 있구나…. 그런데 지금은 친해도, 처음에는 낯선 사람이었을 거 아냐. 그런데 잘 맞았어? 더스틴이랑 나는 만난 지 5년이 넘고 결혼까지 했는데, 안나푸르나 온 첫날부터 둘이 속도 하나 못 맞춰서 싸웠거든. 내가 말했다.


오히려 결혼한 사이가 더 힘들 수도 있지. 우리는 뭐, 지금까지 큰 문제는 없었어. 파란만장한 포의 연애사를 듣는 게 조금 버겁다는 거 말고는…. 조세프가 말했다.


“쟤넨 어느 나라 사람인가. 독일인들인가.”

브렛이 중얼거렸다. 트레커들이 하나둘 모여든 마당은 어느새 남는 의자 없이 꽉 차 있다. 반대편 테이블에 키가 훤칠한 남녀 넷이 앉아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글쎄…. 발음이 독일 발음인 것 같기도…. 말을 걸어보고 싶지만, 너무 자기네끼리 즐거워 보인다.


걷다 만난 산양 무리


“아 흠. 피곤하다 이제.”

조세프가 하품을 했다.

“아직 8시밖에 안 됐어. 다들 밤 9시까지는 자지 말고 버텨야 해.”

람이 말했다. 람은 조세프와 포가 동행하는 가이드다. 담배를 뻐끔대며 람이 말을 이었다.


“너무 일찍 자면 새벽 3시쯤 일어나게 되거든. 그러면 다음 날 산행할 때 무리가 오지.”

“내일 갈 길은 오늘보다 힘들어?”

포가 물었다.

“오늘은 평탄한 길이었잖아. 내일은 아주 힘들 거야. 적어도 아침 7시에는 출발해야 해. 7시까지 마당으로 나와.”


람이 담배를 발로 비벼 끄더니 산장 문밖으로 나갔다. 그러더니 새 담배를 꺼낸다. 포가 람 곁으로 쪼르르 달려가 불을 붙여줬다. 둘이 키도 비슷하고, 턱이 뾰족한 게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


“피부색이 너무 섹시하다나 뭐라나. 포 쟤, 람한테 완전 푹 빠졌어. 프랑스 여자들이 네팔 남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나? 가이드와 트레커 관계로 만나서 결혼한 커플들 정말 많아.”

조세프가 말했다. 테이블에 남은 우리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카드 게임을 시작했다. 프랑스, 미국, 네팔 등 온갖 국적의 카드게임으로 밤 10시까지의 시간을 꼬박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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