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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Jan 20. 2019

이토록 게으른 안나푸르나


어제보다 한 시간 늦게, 아침 7시에 일어났다. 2층 테라스로 나갔다. 이미 갈 채비를 마친 트레커들이 줄줄이 문밖을 나서고 있다. 브렛이 우리를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먼저 가. 다음 마을에서 보자.


“준비 다 됐어? 우리도 슬슬 가보자.”

더스틴이 말했다. 8시다. 나는 더스틴 옆에 잠자코 앉았다.

“지금 못가.”

“왜? 아무리 늦어도 지금은 가야 해. 사람들 다 가고 우리 밖에 안 남았어.”

“어쨌든 지금은 안 되고, 조금만 있다가 가. 생리 시작했어.”


침대에 발랑 누웠다. 여행의 묘미란 이런 것이다. 한 달 반 동안 소식이 없던 생리가 안나푸르나 중턱에서 불쑥 시작되었다. 생전 없던 생리불순이 시작된 김에 산행 내내 소식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신은 나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불불레 마을에서 감기도 걸렸겠다, 어디 이참에 최악의 저혈압 컨디션으로 히말라야를 정복해 보자.


“9시야.”

더스틴이 말했다. 숙소 직원들은 오늘 올 손님을 받기 위해 청소를 하고 방을 세팅하고 있었다. 주인장이 헛기침을 했다. 우리가 얼른 떠나 줬으면 하는 눈초리다. 나도 가고 싶지만, 침대에 들러붙은 몸이 떨어질 줄을 모른다.


“차라리 잘 됐어.”

더스틴의 뒤통수에 대고 내가 중얼거렸다. 안나푸르나에 온 지 이제 사흘이다. 부지런히 가도 아직 2주는 더 가야 한다. 이 산을 오르는 동안 어차피 한 번 은 겪어야 하는 일이다. 고산 지역에서 생리가 터지는 것보다, 몸이 산에 적응하고 있는 지금이 훨씬 낫잖아?


더스틴의 동그란 등은 아무 반응이 없다. 아마 화가 났을 것이다. 브렛, 조세 프, 포, 람과 같이 걷고 싶었던 것 같은데. 침대에 가만히 누워 머릿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이것은 잘된 일이다. 이것은 행운이다. 난 행운아다. 행운, 행운이라고! 일어나라, 일어나!


…. 모르겠다. 200km 거리의 안나푸르나 라운딩, 해낼 수 있을까?


텅 빈 산장의 벽시계가 오전 10시를 가리켰다.





길을 나선 건 10시 반이 지나서였다. 다른 트레커들은 세 시간 거리만큼 앞서 걷고 있을 테다.


“느리게 가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멈추는 걸 두려워하래.”

더스틴을 뒤따라 걸으며 내가 말했다.

“…. 그래도 이건 너무 느리긴 해.”

내가 덧붙였다.


우리는 푸른 나무들 사이를 걸었다. 설산은 언제쯤 보일까? 내가 물었다. 어디서 읽었는데,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는 해발 700m에서 시작해서 5,700m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히말라야 사계절을 다 걸어볼 수 있대. 더스틴이 말했다. 그럼 우린 지금 여름쯤 걷고 있는 거야? 응. 그런 것 같아. 산세는 여름휴가처럼 수월하다. 안나푸르나의 여름을 쉬엄쉬엄, 네 시간 정도 걸으니 다음 마을에 가까워졌다.


“오!”

더스틴이 탄성을 질렀다.

“왜? 설산 보여?”

“올라와 봐.”


더스틴은 돌무더기 급경사 꼭대기에 올라 있었다. 저기까지만 가면 마을이다. 아늑한 산장. 영광의 샤워, 따뜻한 저녁밥. 마을에 가면 누릴 호사를 떠올리며 허겁지겁 돌무더기를 올랐다.


“오!”

내가 외쳤다. 멋지지? 더스틴이 되물었다. 우리 눈앞에는 거대한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널찍한 초록 밭이 푸른 산맥 아래 폭 안겨있다. 마을 이름이 ‘딸’ 이래. 지도를 보며 내가 말했다. 네팔어로 ‘호수’라는 뜻인데, 원래 호수였던 곳을 메꿔서 마을로 만들었데. ‘딸’이 한국어로는 Daughter란 뜻인 거 알아? 꼭 딸 같다, 이 마을.


딸 마을로 들어서는 길


오후 5시였다. 레고 조각처럼 작은 집들 사이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어렸을 때 생각난다. 내가 말했다. 골목에서 애들이랑 놀고 있으면 칙칙폭폭 밥솥 우는 소리가 들렸거든. 우리 집 압력밥솥 소리. 그러고 삼십 분쯤 더 놀고 있으면 엄마가 오빠랑 나를 불렀어. 밥 먹으러 오라고. 그래서 집에 가면 밥상에 김 나는 하얀 밥이 놓여있었어. 가끔 보리밥이 나오면 꽁보리밥이라고 내가 막 싫어하고. 그게 언제 옛날이 돼버렸을까. 신기해. 그건 옛날이 되었고, 난 지금 히말라야에 와 있다는 게.


“어이!”

바짝 깎은 검은 머리의 남자. 브렛이다!


“브렛!”

더스틴이 잦은 발걸음으로 브렛에게 다가가 물었다. 언제 도착했어?

“한 2시쯤 왔나? 프랑스 애들이랑 같이 왔는데. 우리 묵는 숙소로 갈래?”


브렛을 따라 숙소로 갔다. 마당 테이블에서 포와 조세프, 람이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어이, 왔나? 조세프가 말했다. 어제 만난 사이인데, 골목에서 매일 같이 놀던 애들을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반갑다. 우리는 함께 밤 9시까지 카드게임을 했다. 히말라야의 여름밤이었다.


딸 마을의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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