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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Jan 27. 2019

오늘은 어제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오늘도 우리가 꼴찌야.” 

“그래도 어제보다는 한 시간 발전했잖아. 9시니까.” 


내 말에 더스틴이 큭큭 웃었다. 뭐가 웃겨? 우리가. 아침에 일찍 걸어야 할 이유가 그렇게 많다는데. 선선한 날씨에 걸을 수 있고, 구름이 덜 끼어 경치도 좋고…. 그런 거 다 무시하고 그냥 우리 좋을 대로 걷고 있는 우리. 



조세프와 포는 8시간 거리인 차메 마을까지 간다고, 어제 말했었다. 브렛은 걸어보고 어디까지 갈지 결정한다고 했다. 우리는 4시간 거리인 바가르찹까지 간다. 


“헉, 야!” 

내가 소리쳤다. 산세가 생각보다 수월했던 덕에, 바가르찹을 지나 다나큐까지 온 참이다. 앞서 걷던 더스틴이 나의 외침에 뒤를 돌아봤다. 다나큐 반대 방향으로, 웅장한 설산이 병풍처럼 서 있다. 안나푸르나에 올라 처음 마주하는 설산, 마나출루! 


“와….” 

“멋있다. 그치.” 

“응…. 그냥. 그냥. 와….” 


마나출루의 봉우리는 하얗고 선명했다. 열 걸음만 다가가면 만질 수 있을 것 같이 가까워 보인다. 대체 언제부터 저기 서 있었던 거야? 마나출루가 아닌 다나큐 방향으로 가야 하는 우리의 운명이 원망스럽다. 걸을수록 멀어지는 마나 출루 때문에 안 그래도 느렸던 우리의 걸음은 더 느려졌다. 


“더 올라가면 경치가 더 좋겠지?” 

내가 물었다. 


“아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말도 안 되는 일이 다나큐에서 벌어졌다. 눈앞에 등장한 커다란 설산 봉우리들. 뒤를 돌아봤다. 마나출루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다시 앞으로. 한 발 두 발 걸을 때마다 하얀 봉우리들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 말도 안 돼. 


“다나큐에서 묵을까? 경치가 이렇게 좋은데 그래야 하지 않겠어?” 

더스틴이 물었다. 


“음…. 일단 차를 한잔하자.” 

내가 말했다. 이렇게 멋진 설산을 앞에 두고 느긋이 앉아 차를 한 잔 마시지 않는 건 설산에게도, 우리 자신에게도 무례한 짓이니까. 우리는 창이 큰 찻집을 골라 들어갔다. 커다란 컵에 뜨거운 홍차가 가득 담겨 나왔다. 따뜻한 차와 하얀 설산이라.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건가. 


“어 저기. 그제 산장에서 봤던 애들이다. 그치?” 

더스틴이 창문 밖을 보며 물었다. 어 맞아. 브렛이 독일인인 것 같다고 했던 그 그룹. 넷이 시끄럽게 카드 게임하던 애들 맞지. 그런데 오늘은 둘이네. 파란 비니 아래 긴 금발의 곱슬머리를 늘어뜨린 키 큰 여자. 여자보다 키가 조금 더 큰, 마찬가지로 파란 비니를 쓴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커플은 마나출루를 놓아주지 못하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걷고 있다. 5분 전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안녕? 우리 그제 봤는데.” 

커플이 찻집으로 들어왔다. 우리 맞은편으로 막 앉으려는 커플에게 더스틴이 말했다. 


“아…. 어 맞아. 게르묵에서였던가?”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이름은 이반, 함께 있는 여자친구의 이름은 헬레나다. 둘 다 독일이 아닌 체코에서 왔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설산에 대 한 찬사를 쏟아냈다. 마나출루 멋있지. 저 봉우리 이름이 마나출루야? 대체 언제부터 저기 있던 건지 너희는 알아? 바가르찹에서는 안 보였었던 것 같은데. 몰라. 다나큐 들어와서 뒤를 돌아봤는데 있더라고. 숨 멎을 뻔했어. 


“그제 우리랑 같이 있던 커플 기억나?” 

이반이 물었다. 


“맞아. 너희 그 날 네 명이 같이 있었잖아.” 

이틀 전 산장에는 이반처럼 키가 큰 건장한 체격의 남자와, 작지만 단단한 체격의 짧은 머리 여자가 같이 있었다. 


“체코에서 같이 온 친구들이야. 일행 한 명이 더 오기로 했는데, 어제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했다고 해서 데리러 간다고 다시 내려갔어.” 

이반이 말했다. 


“데리러 가?” 

“응.”  

“일정 맞춰 같이 오지 왜 굳이 산 중턱까지 올라왔다가 데리러 내려가?” 

“이제 막 도착한 친구는 원래 올 계획이 없었는데, 막판에 오기로 결정했거든.” 

누군지 모르지만 이 산으로 오기로 했다니, 잘한 일이다. 정말 잘한 일이야. 


“그럼 이제 넷이 따로 걸어?” 

“응, 당분간은. 그런데 다시 만날 거야. 우리는 천천히 걷고, 그 친구들은 조금 속도를 내서 걷기로 했어. 그럼 언젠가 만날 테니까.” 


천천히 걸어야 하는 이반과 헬레나는 다나큐에서 머문다. 더스틴과 나는 조금 더 걷기로 했다. 다나큐에서 한 시간 떨어진 거리의 마을인 띠망의 경치가 좋다고 했던, 어젯밤 람의 말 때문이다. 지금 여기보다 경치가 더 좋다는 건 믿기 어렵지만, 람의 말이니까 믿어보기로 한다. 


“람이 맞았어.” 

더스틴이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나큐에서 멀어질수록, 띠망에 가까워질수록, 설산의 전경은 점점 더 극적으로 펼쳐졌다. 마나출루는 여태 저 뒤에 묵묵히 서 있다. 오른쪽으로 커다란 산봉우리 하나가 등장했다. 정면으로 나타난 하얀 설산은 띠망에 가까워질수록 커졌다. 저 봉우리들은 이름도 모르겠다. 실제 크기는 마나출루보다 훨씬 작겠지만, 지척에 있기에 믿을 수 없이 크고 아름답다. 사방으로 펼쳐진 차가운 설산. 그 가운데로 흐르는 봄 같은 계곡. 빼곡히 선 초록 나무와 흐드러지게 핀 분홍색 들꽃. 


“여기 무슨 무릉도원 같아.” 

하얀 설산과 분홍 꽃, 초록 나무가 공존하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 보며, 내가 말했다. 신들의 땅이 있다면 이런 곳일 텐데. 내가 발을 딛고 사는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그것도 모르고 난 딱딱한 아스팔트만 걸으며, 네모난 빌딩만 보며 살았어. 신들의 땅에서는 어제의 풍경이 그제보다 아름답고, 오늘의 풍경이 어제보다 멋지다. 내일은 오늘보다 아름다울 터다. 위로 올라갈수록, 믿을 수 없는 신들의 세계가 더 극적으로 펼쳐질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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