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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Feb 10. 2019

비가 온다고 나쁠 것도 없지

다르지만 가능한 삶의 방식

산장에 달린 나무문은 아귀가 맞지 않았다. 삐걱. 문을 여니 이른 새벽의 찬 공기가 슬그머니 새어 들어왔다. 문밖에 선 마나출루의 봉우리가 한겨울 장작불처럼 붉게 달아오르고 있다. 그러다 뜨거운 햇살이 하얀 설산 위로 출렁, 넘쳐흘렀다. 


오늘은 조금만 걷자. 더스틴이 말했다. 웬일이야? 내가 물었다. 감기 든 것 같아. 밤새 벽 사이로 새어 들어온 산 공기 때문인가 보다. 공기가 조금 따뜻해지길 기다리며 아침 식사를 했다. 오믈렛과 토스트는 따뜻하고, 앞에 보이는 하얀 설산은 차다. 


9시쯤 길을 나섰다. 세 시간을 걸어 어제 만난 포터가 간다던 차메 마을에 닿았다. 하루 세 시간 산행은 어정쩡한 것 같아 2시간 거리인 브라탕까지 가 보기로 했다. 걸을수록 공기가 조금씩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토록 느리고 게으르게 걸었는데, 우리는 어느새 해발 3,000m에 올라와 있다. 안나푸르나 중턱에 걸린 구름 어디쯤을 걷고 있으려나. 


우리는 어느새 해발 3,000m에 올라와 있다.




브라탕 숙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인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한 시간 반 거리인 듀크레 포카리로 향했다. 옷이 이슬에 젖어 온몸이 오슬오슬 떨린다. 반팔 아래 드러난 두 팔이 저린다. 손가락 끝이 얼얼하다. 더스틴이 기침을 콜록댔다. 차메에서 멈추는 건데 괜히 욕심부렸나 봐. 


“어. 비와.” 

더스틴이 말했다. 하늘 높이 솟은 침엽 나무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배낭에서 후드티를 꺼냈다. 


“이거 입었으니까, 우리는 이제 공식적으로 히말라야의 여름을 거쳐 가을로 온 거야.” 


하늘색 바람막이 재킷을 껴 입으며 더스틴이 말했다. 히말라야의 여름은 저물었다. 우리는 어느새 히말라야의 가을을 걷고 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서두르지 않으면 소나기를 맞으며 산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빗물이 내려앉은 길 위에서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히말라야의 가을


후드드득. 


결국, 소나기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두 손으로 머리를 가렸다. 그리고 뛰었다. 희미하던 오후 빛마저 사라져 버리고, 숲 속엔 어둠만 남았다. 어둠 속, 빽빽한 소나무 사이사이로 커다란 산이 보일 듯 말 듯하다. 저 멀리 아득한 불빛이 드문드문 보였다. 쏟아지는 비에 눈도 잘 뜨지 못한 채 열심히 뛰었다.


첫 번째 나온 산장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렸다. 하얀 불빛 아래 모여든 사람들. 여러 개의 손이 얼른 들어오라며 우리에게 손짓했다. 산장 주인이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넓고 깨끗한 방이었다. 창밖으로 비가 무섭게 쏟아졌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해는 이미 어디론가 달아나버리고 없다.


샤워를 하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식당으로 갔다. 아는 얼굴은 없었다. 중년 남자 하나와 젊은 남자 둘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합석했다. 


“그렇게 많은 곳을 가봤지만, 나의 영원한 사랑은 필리핀이야.” 

말이 가장 많은 사람은 미국에서 온 마커스였다. 밝은 갈색 머리를 자연스럽게 뒤로 넘긴,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체격 좋은 아저씨.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과 대화하는 게 익숙한 영어권 사람들이 그렇듯, 마커스는 느릿하면서도 뚜렷한 말투로 우리 한 명 한 명의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더스틴과 나, 그리고 우리와 함께 앉은 프랑스에서 온 니코와 폴은 담임 선생님의 지나온 옛 시절을 듣는 얌전한 고등학생처럼 턱을 괴고 앉아 마커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필리핀이 왜 그렇게 좋은데?” 

내가 물었다. 


“사람들이 천사 같거든.” 

마커스는 여행을 정말 많이 다녔고, 특히 트레킹을 좋아한다. 안나푸르나는 이번이 두 번째다. 


“3년 전에는 PCT를 걸었어.” 

“오, 그거 엄청 오래 걸리지 않아? 얼마 동안 걸었어?” 

더스틴이 물었다. PCT 나도 가봤어. PCT 정말 가고 싶은데! 네 남자 사이에서 PCT인지 뭔지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게 뭔데? PCT?” 

내가 물었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 멕시코에서 캐나다까지 이어지는 길이야.” 

얼굴이 작고 뾰족한 니코가 찻잔을 내려놨다. 더스틴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맛을 다셨다. 뭔데 이 남자들은. 


“기회가 되면 나도 꼭 걸어보고 싶어. 엄청 오래 걸리지? 얼마 동안 걸었어?” 

더스틴이 눈을 들어 마커스를 바라봤다. 마치 왕년에 록 밴드로 잘 나가던 동경하는 외삼촌이라도 만난 것 같은 눈빛으로. 


“5개월 정도. 그런데 다른 사람은 더 걸릴 수도 있어. 나는 운동도 자주 하고 걸음도 빠른 편이거든.” 

“그럼 우린 한 2년 정도 걸리겠네. 우리는 운동도 안 하고 걸음도 엄청 느린 편이니까. 히히.” 

내 말에 더스틴이 피식 웃었다. 잠시 PCT를 걷는 나를 상상해봤다. 할 수 있을까? …. 그래, 못할 건 뭔데. 커다란 배낭을 메고, 멕시코에서 캐나다까지 걷고 걷고 걷는 일.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찻잔에 담긴 티스푼을 돌돌 돌리며 내가 물었다. 마커스가 나를 보며 눈썹을 높이 들었다 내렸다.  

“어떻게 그렇게 여행을 많이 했어? 그러니까 내 말은…. 돈이 어디서 나와?” 

그러니까 내 말은…. 나도 좀 알자고 그 비법. 난 스페인에 가고 싶은데, 중국 여행도 길게 하고 싶고. 게다가 내 옆에 앉은 남편이라는 사람이 PCT까지 가고 싶다고 하니. 


“난 필리핀에서 영어를 가르치거든. 1년 2년 일하면 장기 여행할 돈이 어느 정도 모여. 그러면 여행을 가는 거야. 여행하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필리핀으로 가서 일하고.” 

“그렇게 단순해?” 

“나는 40대지만 가족도 없고 빚도 없거든. 가족과 빚이 없으면 가능한 생활이야.” 


다르지만 가능한 삶의 방식. 


나도 가능하지 않을까. 돈은 없지만 학자금 대출도 다 갚았겠다, 빚도 없다. 더스틴이라는 가족이 있지만 나만큼 미쳐있다. 원한다면 우리도 마커스처럼 살 수 있다. 꼭 마커스처럼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겠다, 하는 건 아니지만, 마커스처럼 사는 사람도 지구 어딘가에는 있다는 건 큰 위안이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히말라야에 와서 자주 드는 생각이다. 5년 동안 여행을 했다는 조세프. 필리핀을 기점으로 지속적으로 여행을 하는 마커스. 모두가 똑같은 선택을 해야 하고 그렇기에 줄을 서야 하며, 조금만 지체하거나 방심하면 낙오자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회에서 온 나에게는 신선한 삶의 방식이다. 


조금만 용기를 내면 담장 너머의 것들을 볼 수 있다. 직장을 갖고 승진을 위해 애쓰는 것이 유일한 삶의 방식은 아니라는 것. 정형화된 삶이 조금 덜 불안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딱히 더 의미 있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 필요할 땐 돈을 벌지만, 평생 여행하기를 고수하는 삶의 방식 또한 가능하다는 것. 좀 더 불안하고, 위험하고, 불편하지만, 누군가는 오답이라고 하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 방식이 더 의미 있고 가치 있을 수 있다는 것. 우리는 모두, 그저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해 애쓰는 존재라는 것. 누구도 절대적으로 틀리지도, 옳지도 않다는 것. 


모두가 다르지만, 누구도 이상할 것 없는 사람들이 모인 산장 밖으로 비가 세차게 내렸다. 비가 온다고 나쁠 것도 없다. 오답은 없으니까. 밤새 비가 쏟아지고 나면 봉우리 사이에 잔뜩 껴있던 구름도 모두 걷히고, 하늘은 더 청량하게 개어 있을 테니까.  


밤새 비가 쏟아지고 나면, 하늘은 더 청량하게 개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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