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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Feb 17. 2019

갈수록 설상가상이다, 내 처지 말고 히말라야가


방문을 열었다. 어제 먹구름에 감춰져 조금도 보이지 않던 듀크레포카리의 얼굴이 맑게 개어있다. 빙하처럼 매끈한 거대한 바위산 하나가 산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옆에도, 그 옆에도, 손에 잡힐 듯한 설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히말라야의 가을 풍경은 이렇구나. 


듀크레포카리


식당으로 갔다. 니코와 마커스가 채비를 하고 있다. 털모자와 바람막이 잠바, 스키 장갑까지 끼고. 역시 프로 트레커들 답군. 


“가려고?” 

자리에 앉으며 내가 말했다. 


“응. 너흰 어느 쪽으로 가? 어퍼 피상 아님 로워 피상?” 

니코가 물었다. 


“글쎄…. 생각 안 해봤는데.” 

“마커스랑 나는 로워 피상으로 갈 거야. 마커스가 지난번에 왔을 때 어퍼 피상으로 갔대. 어퍼 피상은 길이 좀 힘들고 돌아가는 길 이래. 대신 경치는 엄청나다고 하더라. 로워 피상은 길이 수월해서 더 빨리 갈 수 있어. 그래서 그 길로 가려고. 오늘 마낭까지 가는 게 우리 목표거든.” 


“자, 이제 가봐야지!” 

마커스가 출동 선언을 했다. 니코가 허연 입김을 불며 그 뒤를 따랐다. 저기…. 이제 새벽 6시야…. 정말 힘이 넘치는 사람들이다. 


“어퍼 피상으로 가자. 우리는 빨리 갈 필요 전혀 없잖아.” 

더스틴이 말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내가 맞장구를 쳤다. 생각하고 말 것도 없어. 조금 더 힘들고 오래 걸리더라도 어퍼 피상으로 가야지. 설산 경치가 끝내준다잖아. 그제 다나큐에서 처음 마주한 설산이 준 충격 이후로, 우리는 설산 경치가 좋다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이 너무 많다.  





해가 눈부시다. 뒤로는 손에 잡힐 것 같은 거대한 설산이, 앞으로는 초록 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널찍한 평원이 펼쳐져 있다. 갈수록 설상가상이다. 내 처지 말고 히말라야가. 몇백 년 전에 내려 얼어붙었는지 모를 눈 위로, 어제와 오늘 내린 눈이 켜켜이 쌓여있다. 몸 전체가 하얗게 뒤덮인 거대한 산들이 각자의 자태를 뽐내며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야,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자.” 

내가 말했다. 어퍼 피상에 도착한 참이다. 안나푸르나 2봉이 전면에 우뚝 서 있는 마을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현세의 풍경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풍경을 오늘이 아니라면,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어디서 다시 마주할 텐가. 오늘 얼마나 더 멀리 가는지, 정상에 얼마나 빨리 닿는지는 전혀 중요치 않다. 오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풍경만이 중요하다. 


안나푸르나 2봉이 정면으로 보이는 식당 2층으로 올라갔다. 밀크티를 주문했다. 안나푸르나의 하루는 이렇게 요약된다. 아침에 눈을 뜬다. 술렁술렁 갈 채 비를 하고 길을 나선다. 2시간 정도 걷다 잠깐 멈춰 차를 한잔한다. 다시 두 시간 정도 걸은 후 점심을 먹는다. 물론 차를 곁들여서. 오후 3시나 4시쯤 도착한 마을에 짐을 푼다. 전 마을에서 만났던, 혹은 처음 만나는 트레커들과 저녁을 먹는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카드 게임도 하며 9시까지 시간을 채운다. 잔다. 단순하고 흡족한 생활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계속 잠바를 입은 채로 걸었다. 쌀쌀한 아침에만 잠깐 입고 벗던 잠바였는데. 땀을 잔뜩 흘리고 마시기에는 조금 덥던 차도 이제 몸을 녹이기에 딱 적당하다. 어퍼 피상의 고도는 3,300m. 마을 사람 모두 두꺼운 옷을 겹겹이 입고, 머리에는 커다란 털모자도 하나씩 쓰고 있다. 


“저거 봐.”  

더스틴이 턱으로 식당 아래를 가리켰다. 창 아래를 내려다봤다. 털모자를 쓴 아저씨 네 명이 동그랗게 모여 있다. 환타 병을 들고 있는 아저씨가 다른 아저씨들의 오므린 두 손에 한 모금 분량의 환타를 조금씩 따른다. 아저씨들이 손에 담긴 차가운 탄산을 단숨에 들이켰다. 


“캬!” 

씩. 아저씨들이 설산처럼 하얀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세상에 둘도 없이 눈부신 풍경 속에서 느끼는, 세상에 둘도 없을 청량함이다. 




어퍼 피상 마을을 벗어나니 구불구불한 경사길이 나왔다. 


“여기는 정말 천천히 올라야 해. 여기 고도가…. 3,000m 이상부터 고산병을 조심하라 그랬는데 벌써 여기 고도가….” 

지도를 확인했다. 고도 3,300m. 안 그래도 높은 고도인데 다음 마을인 가루까지 고도 차이가 무려 700m나 난다. 


“지금까지 걸었던 대로 걸어. 넌 충분히 천천히 걷고 있잖아.” 

더스틴이 말했다. 시끄러워. 난 더 천천히 걸을 거야. 트레커 세 명이 우리를 앞질렀다. 어, 안녕? 이틀 전 어느 벌판에선가 널브러져 쉬고 있을 때 잠깐 인사했던 트레커들이다. 여자 둘에 남자 하나. 더스틴이 대화를 잇더니 그들과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나 혼자 멀찍이 떨어져 내 속도를 유지, 아니 평소보다 살짝 더 천천히 걸었다. 머리가 멍한 것 같다. 숨도 좀 찬 것 같고. 2초에 한 발 정도 떼는 속도로 걸었다. 이렇게 천천히 걷는데 왜 숨이 찰까. 고산병에 너무 신경 쓰다 보니 꾀병이 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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