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온다!”
내가 외쳤다. 마침 가루에 도착한 참이다. 안나푸르나에서 만나는 첫눈이다. 눈송이 봐, 정말 크다. 더스틴이 말했다. 눈은 몇 분 만에 나무 위로, 바위 위로, 그리고 더스틴의 털모자 위로 두껍게 쌓였다.
어떻게 할까? 콧수염 위로 쌓인 눈을 털어내며 더스틴이 물었다. 원래 가려고 했던 나왈까지는 여기서 두 시간 거리야. 음…. 오늘은 가루에서 묵자. 눈 구경도 할 겸. 그리고 저 눈보라를 뚫고 걷다가 눈길에 갇히고 싶진 않아. 내가 말했다.
“50루피.”
산장 주인이 값을 불렀다. 음식을 많이 시켜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돈을 지불했다. 네팔 돈 50 루피면 한국 돈으로 700원 정도다. 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역시 가이드북은 믿을 게 못 된다. 산 위로 올라갈수록 숙박비와 식비가 말도 안 되게 비싸질 거라고 하더니. 산 중턱부터 음식 가격은 거의 그대로인 반면, 산장 가격은 100루피를 넘는 법이 없다. 언덕 위에 자리한 산장은 비좁았다. 먼저 도착한 이스라엘 트레커들이 한 개뿐인 식당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니, 원래 같이 온 건 아니야. 안나푸르나 초입에서 만났어. 그때부터 같이 걷고 있어.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은 같이 여행하는 걸 좋아하거든.”
친구끼리 여행하는 거냐는 더스틴의 질문에 여자가 답했다. 털모자를 뒤집어쓴 긴 갈색 머리에 건강하게 탄 얼굴. 여자의 이름은 엘리아나다.
“이스라엘 사람이야? 난 영어가 너무 유창해서 미국 사람인 줄 알았어….”
내가 말했다.
“태어난 건 미국 맞아. 필라델피아에서 나고 자라다 3년 전에 이스라엘에 이민을 갔어.”
“아, 그럼 부모님은?”
“부모님은 나 태어나기 전에 이스라엘에서 미국에 이민을 가셨는데, 아직 미국에 계셔. 나만 혼자 이스라엘로 다시 국적을 바꿨어.”
“아…. 왜 다시 이민을 했는데?”
“군대에 가려고. 이스라엘에선 남자건 여자건 성인이 되면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 해. 성인 나이가 되고 나서 미국 국적을 포기했어. 군에 입대하려고 이스라엘 사람이 된 거야.”
“아….”
궁금한 게 많았지만 취조하는 기분이 들어 그만두었다. 나 같으면 거꾸로, 군대에 안 가기 위해 이스라엘 국적을 포기했을 것 같은데. 그들은 나왈까지 간다며 배낭을 챙겼다. 저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괜찮아, 우린 다 군 복무를 마치고 온 사람들이거든. 씩씩한 그들은 산장을 나서 눈 내리는 산길을 저벅저벅 걸어갔다.
“나왈에 안 가길 잘했다.”
더스틴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나 머리 아파, 조금 올라갔다 내려오자. 내가 말했다. 고산병 예방의 첫 번째 방침은 클라임 하이 슬립 로우(Climb high, sleep low, 자는 곳보다 높은 고도로 올라갔다 내려오기). 우리는 함박눈이 내리는 가왈의 언덕을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작은 나무 화장실에 들렀다. 밤새 화장실은 못 가겠다. 엉덩이 어는 줄 알았어. 내가 말했다.
이스라엘 트레커가 떠난 산장 거실에는 우리뿐이다. 창밖으로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렸다. 눈송이 크기 좀 봐. 정말 예쁘다. 이제 안나푸르나의 겨울인가 봐. 우리는 아무도 없는 나무 산장에 앉아, 창밖으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눈은 금세 내 발목 높이로 쌓여버렸다. 오늘 식목일이네. 한국에서는 말이야. 봄이 와서 나무 심는 날이야 오늘. 내가 말했다. 밖에 저렇게 눈이 펑펑 내리고 있는데 내가 떠나온 곳은 봄이라니, 이상하다. 산장 주인이 숯불이 가득 든 양철통을 가져다주고는 불에 손을 쬐는 시늉을 했다. 아, 고마워요. 빨갛게 피어오르는 숯불 위로 손을 올렸다. 발도 올렸다. 찬 공기 탓인지 불씨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저…. 난로가 꺼졌는데….”
추위를 참지 못하고 산장 가족이 모여 있는 부엌 안으로 고개를 빼꼼히 들이밀어버렸다. 컴, 컴. (Come, come) 산장 주인이 얼른 들어오라고 손짓하고는 의자 두 개를 내주었다. 한가운데 커다란 난로가 있는 부엌 안 공기는 따뜻했다. 주인아저씨는 난로 옆에서 양털을 짰다.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자. 몽글한 눈빛으로 우리를 보는 할머니. 네팔어로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가는 두 삼촌….
히말라야의 겨울밤. 따뜻한 공기에 졸음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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