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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Mar 03. 2019

지금 여기, 내 앞에

가루 산장의 좁다란 창살 위에 눈이 소복이 쌓여있다. 두툼하게 쌓인 눈. 한 숟갈 떠서 먹으면 꽤 맛있을 것 같다. 담요 밖을 나왔다. 산장 벽에서 나무 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고작 이 나무 벽이다. 차가운 눈이 밤새 내리는 것도 모르게 나를 재워준 건. 


눈 쌓인 가루


잠들기 전 느꼈던 두통은 말끔히 가시고 없다. 회색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것 처럼 흐리멍덩하던 하늘도 개운해져 있다. 있는지도 몰랐던 안나푸르나 2봉이 창밖에 서 있다. 허름한 산장의 나무 창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아니, 너무 잘 어울린다. 


“이제 마낭까지 하루 이틀이면 가. 신기하지?” 


담요 안으로 다시 들어가 몸을 웅크리며, 내가 말했다. 마낭에서 쏘롱 라까지는 한 사흘 걸리나? 더스틴이 물었다. 응. 무섭지 않아? 난 어제 그 구불구불한 경사길도 무섭던데. 쏘롱 라는 험하잖아. 고도도 훨씬 높고. 눈사태가 날 수도 있고. 거의 죽다 살아났다는 사람도 있고. 정말 죽은 사람도 있고…. 


“오늘은 나왈까지만 걷자. 어제 마커스가 그랬잖아. 가왈에서 나왈까지 가는 구간이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 중 경치가 제일 좋다고.”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나왔다. 김이 펄펄 나는 오믈렛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더스틴이 말했다. 그래! 내가 답했다. 더 천천히 걷자는 제안은 언제든 찬성이다. 게다가 가장 좋은 경치라니! 나는 다이어리를 꺼내 안나푸르나 지도를 펼쳤다. 가루에서 나왈까지는 2시간 거리다. 나왈에서 하루만 더 걸으면 브라가 마을, 거기서 한 시간을 걸으면 마낭이다. 마낭은 소설로 치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구성 중 전개의 끝 정도 되는 지점이랄까. 마낭 너머에는 위기로 치닫게 될, 쏘롱 라가 기다리고 있다.  



“어퍼 피상에서 본 경치보다 더 좋대. 설산 봉우리들이 완전 파노라마처럼 한 눈에 다 보인대. 믿어져?” 

더스틴이 머리에 뒤집어쓴 비니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어제보다 멋있대? 어. 그제보다? 어. 말도 안 돼…. 


“그런데 진짜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우리 며칠 전부터 계속 이 소리하고 있잖아. 오늘보다 더 멋있을 순 없다고. 그런데 계속 말도 안 되게, 정말 계속 멋있어지고 있어.” 

찻잔에 각설탕 한 개를 더 넣었다. 원래 달게 먹는 차는 안 좋아하는데, 안나푸르나에 오르고 나서부터 각설탕 세 개는 기본이 되었다. 어제 나왈까지 안 가고 남겨두길 잘한 것 같다. 오늘은 나왈까지만, 가늘고 길게 걷는 거야. 




“하얘…. 온통 하얘….” 

눈밭 위를 살살 걸으며 내가 말했다. 밤새 내린 눈에 길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산장을 나서자마자 하얗고 좁은 산길이 이어졌다. 좁은 골목을 돌아 나갔다. 눈을 들어 산을 봤다. 


밤새 내린 눈에 길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아….” 

“어….” 

누가 배를 쿡 찌르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동시에 짧고 가는 소리를 내질렀다. 어퍼 피상에서부터 보이던 안나푸르나 2봉이 눈앞에 서 있다. 모퉁이를 하나 더 돌았다. 안나푸르나 2봉 뒤에 가려져 있던 설산들이 자기소개 하듯 차례로 등장했다. 안나푸르나 3봉, 안나푸르나 4봉, 강가푸르나, 틸리초 정상…. 그리고 그밖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무수한 봉우리들. 심장인지 근육인지 모를 것이 속에서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울어버려야 하나. 방방 뛰어야 하나. 어쩔 줄 모르겠다. 눈앞에 펼쳐진 설산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에,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천천히 발만 질질 끌었다. 


“잠깐 앉자.” 

내가 말했다. 멍청하게 넋을 놓고 있던 더스틴이 나를 슬쩍 쳐다봤다. 하얀 설산에 내 존재 따위는 하얗게 잊고 있었던 것 같은 눈빛으로. 더스틴의 배낭은 이미 바닥에 놓여 있었다. 앉자. 우리, 아무데도 가지 말자. 더스틴이 입을 헤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개의 웅장한 설산 봉우리를 마주하고 앉은 우리는, 더욱 마음 놓고 넋을 놓아버렸다. 말도 안 돼. 저 설산들은 언제부터 여기에 저러고 있었던 거야? 면접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던 4년 전에도, 비 오는 출근길 회사로 뛰어가던 작년 그날에도, 더 오래전, 수능시험을 보고 우울해하던 그 날에도 여기 이렇게 조용히 서 있었던 걸까. 그때부터 이렇게 쭉, 지금까지 서 있었던 거야? 그리고 지금 여기, 내 앞에 있어.  


지금 여기, 내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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