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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Dec 30. 2018

안나푸르나의 첫날밤

“더스틴, 우리는 포터(짐 들어주는 일꾼. 주로 네팔 현지인이다)도 가이드도 안 데리고 왔잖아.”  

“응.” 

“그러니까 둘이 어떻게든 죽지 않고 이 산에서 살아 돌아가야 하잖아.” 

“그렇지.” 

“그런데,” 

“응.” 

“만약 무슨 일이 생겨서…. 그러니까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말이야. 네가 죽는 거랑 내가 죽는 것 중에, 너는 어느 쪽이 견디기 덜 힘들 것 같아?” 


“음….” 

“흠….” 

“아무래도 네 쪽이 낫지 않을까.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점차 익숙해지고….” 

낄낄. 맞아 맞아 나도 그래. 나는 좋다고 웃었다. 더스틴도 재밌다고 웃었다. 역시 우린 유머 코드가 맞는다니까. 야 그런데 농담이 좀 심한 거 아냐? 무슨 남편이 말을 그딴 식으로 하냐? 뭐야, 농담이잖아. 너도 마찬가지라며. 


…. 그런데 이 산, 살아서 내려갈 수 있겠지? 내가 말했다. 사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는데. 산에 와서 몇 걸음 걸으니까 실감 나. 그냥 걸으려고 온 건데, 조금 더 비장했어야 했나. 안나푸르나 등반하다 사망하는 사고가 1년에도 몇 번이나 일어난대. 어제 한국 식당에서 들었어. 한 달 전에 안나푸르나 ABC 코스 등반하다 눈사태로 죽은 한국인만 네 명이래. 


안나푸르나에서 처음 마주한 현수교. 첫날부터 위협적이다.


세 시간을 걸으니 첫 검문소다. 포카라에서 받아온 안나푸르나 등반 허가증에 첫 도장을 찍었다. 먹구름 같던 두려움이 걷히고, 다시 햇살 같이 신이 났다. 뒤에서 걷던 트레커들이 하나 둘 우리를 앞질러 갔다. 


“야, 속도 좀 내서 걸으면 안 돼?” 

다섯 걸음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며 앞서 걷던 더스틴이 말했다. 먹구름 같은 짜증이 다시 나를 덮었다. 왜 시비야? 빨리 가고 싶으면 혼자 가든가. 더스틴은 나를 한참 노려보더니 앞으로 저만치 가버렸다. 어쭈. 씩씩한 것인지 씩씩 거리는 것인지, 성큼성큼 걷던 더스틴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수지.” 

저 멀리서 빳빳한 나무처럼 서 있던 더스틴. 내가 가까워지자 낮은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왜? 뭐 또 좀 빨리 오라고?” 

빨리 가면 뭐할 건데? 정상에 꿀 숨겨놨냐? 느리게 가면 안 돼? 같이 걸으려고 왔는데 네가 속도 좀 맞춰주면 되는 거 아냐? 


“그래. 내가 맞춰줄 수 있지.” 

“그래. 그러면 되잖아. 왜 자꾸 시비야.” 

“근데 느려도 어느 정도 느려야지. 그렇게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느린 속도로 걸을 필요는 없잖아. 나 골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 앞으로 몇 날 며칠 같이 걸 어야 하는데, 너도 좀 맞춰야 하는 거 아냐?” 

“나도 맞추고 있는 거야. 네가 아까 빨리 걸으라고 해서 속도 내고 있는 거라고. 뭐? 내가 널 골리려고 일부러 천천히 걸어? 내가 그렇게 꼬인 사람으로 보이냐? 나는 그냥 내 속도로 걷고 있을 뿐이야. 아니, 너한테 맞추려고 내 속도보다 빨리 걷고 있는 거라고. 그래도 너보다 느린 걸 나보고 어쩌라고?” 


더스틴이 한숨을 쉬더니 앞으로 걸어갔다. 더스틴 말마따나, 앞으로 몇 날 며칠을 같이 걸어야 하는데 속도부터 안 맞으면 어쩌나. 나는 등산 스틱 삼아 챙겨 온 대나무 작대기를 바닥에 질질 끌며 더스틴을 뒤쫓았다. 




검문소에서 한 시간쯤 걸으니 불불레 마을이다. 안나푸르나의 첫날밤은 여기서 지낸다. 힘차게 흐르는 강물 위로 난 현수교를 건너, 통나무로 지어진 숙소로 갔다. 진작에 도착한 트레커들이 강가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동그란 얼굴이 어딘가 영화배우 폴 다노를 닮은 것 같은 미국인 브렛. 긴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까끌까끌해 보이는 턱수염이 있는 이스라엘인 엘리. 검문소에서 만난 트레커들이다. 우리는 그들의 테이블에 합석했다. 


“뭐 먹을래요?” 

“음…. 삶은 감자랑 오믈렛. 그리고 민트티요.” 

주문을 받은 주인아주머니가 부엌으로 돌아갔다. 강바람이 시원하다. 테라스 에 모인 트레커들은 출신이 다양했다. 


“독일에서 왔어. 얘가 히말라야에 간다길래 나도 기회다 싶어서, 휴가 내고 따라왔지.” 

“우린 네덜란드에서 왔어. 나는 선생님, 남자 친구는 대학원생. 작년에 친구 한 명이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를 걸었는데 너무 좋았다고 해서 왔어.”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옆 테이블에 앉은 트레커들이 차례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한국, 그리고 미국에서 왔다. 인도를 5개월 여행하고 네팔로 왔다. 직업은 없다. 안나푸르나를 며칠간 등반할지는 모르겠다. 역시 우리가 제일 이상하다. 


불불레 마을의 힘찬 강물


“여기 올 때 버스 지붕 위에 사람들 타는 거 봤어? 왜 그러는 거야?” 

나는 5분 만에 감자를 먹어치웠다. 앞에 앉은 브렛과 엘리가 눈을 껌벅였다. 

“나도 버스 지붕 위에 탔어.” 

엘리가 말했다. 

“진짜? 왜? 무섭지 않아? 떨어지면 어떡해.” 

“아니. 오히려 더 안전하지. 버스가 벼랑 아래로 떨어지면 어쩌려고. 지붕 위에서 길 쪽으로 훌쩍 뛰어내리는 게 훨씬 안전해.” 

엘리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는 민트티를 한 모금 마셨다. 아, 그런 심오한 뜻이. 


강물 소리는 꽤 우렁찼다. 우리는 목청을 높여, 지나온 여정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말소리. 웃음소리. 민트티의 알싸한 향기. 강가에 석양이 졌다. 저녁을 다 먹고 보니 밖이 어두워져 있다. 우리는 각자의 손전등을 들고 나무로 지어진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비에 젖은 통나무 냄새가 났다. 어둠은 손전등 불빛에도 잘 비켜나지 않았다. 삐걱대는 나무 바닥을 손으로 더듬어가며 침대 위로 올랐다. 통나무 틈새 너머로 옆방 브렛과 엘리의 말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7시쯤 일어나서…. 아침밥…. 삐걱삐걱, 나무 산장 위를 조심스레 밟는 다른 트레커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오늘 어땠어? 안나푸르나에서의 첫날. 더스틴이 물었다. 좋았어. 그렇게 힘들지도 않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8시쯤 되었을까. 발소리도,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힘찬 강물 소리만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좋다. 


모두가 잠든 불불레 산장. 아직은 서로를 잘 모르는 트레커들. 아마 이 산을 내릴 때쯤에는,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사이가 되어 있지 않을까. 창밖 머리 위로 강바람이 불었다. 시원한 바람에, 달뜬 밤 뜨거워진 머리를 조금씩 식히며 잠이 들었다. 안나푸르나에서의 첫날밤이었다. 


불불레 마을 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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