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종단하다 이혼할 뻔 09
여름 흥이 깨져버린 캠핑장엔 아무도 없었다. 캠핑장은 펜션과 함께 운영되는 곳이었다. 캠핑장에 딸린 식당 옆 주방에서 주인아저씨가 나왔다.
“전기 쓰려면 이만 오천 원, 아니면 이만 원 그래요.”
샤워실도 있어요. 저기, 컨테이너 박스. 혹시 바비큐 시설 필요하시면 만원 추가하시면 되고. 고기랑 그런 건 여기 식당에서 팔고. 텐트는 저기 E-2라고 써진 곳에다가 치시면 되고요. 값을 치르고 아저씨가 말한 ‘E-2’라고 표시된 곳으로 갔다. 우리에게 할당된 E-2는 작은 원룸 하나가 들어서도 될 만큼 거대했다. 우리 텐트 네 개는 들어가겠다. 내가 말했다. 더스틴이 배낭을 내려놓고 텐트를 꺼냈다. 공간 4분의 1만 쓸 테니까 반만 깎아달라고 하면 안 되겠지.
“말이 되냐. 이 사람들도 먹고살아야지.”
더스틴이 말했다.
“…. 그래. 이 사람들도 먹고살아야지. …. 먹고살아야 하니까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이 작은 마을도, 서울에서 일하다 놀러 나오는 사람들 기준으로 뭔가를 만들어 놓는 거겠지. 이 캠핑장도, 옆집 펜션도, 그 옆집 펜션도…. 근데 우리는 휴가를 온 게 아니니까…. 우리같이 작은 텐트를 칠 아주 작은 공간만 필요한 손님은 사장님 입장에서도 좀 귀찮을 거야.”
“무리를 했으면 여기 캠핑장 아니고 다른 한적한 곳 아무 데나 텐트를 쳤어도 됐겠지만, 오늘은 첫날이잖아. 첫날밤부터 쫓겨나거나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 건 좀 그래. 앞으로 캠핑장 아닌 데서 캠핑하는 일이 많을 수도 있으니까…. 오늘은 워밍업 하는 차원에서 좀 안전하게, 정해진 데서 잔다고 생각하자. 돈은 좀 내야 하지만.”
텐트 폴을 천 안에 끼웠다. 탈모가 진행된 정수리처럼 시든 잔디가 듬성듬성 난 흙바닥 위로 고정대를 단단히 박았다. 고리를 끼우니 주황색 텐트가 슬그머니 일어섰다.
“됐다. 집 완성.”
더스틴이 말했다. 응. 집 완성. 앞으로 당분간은 이게 우리 집이야. 두 사람이 들어가면 꼭 끼는, 형광 주황색 텐트. 밝은 카키색 타르프를 두르면 웅크린 벌레 같아 보이는. 우리 집.
텐트 안에 침낭을 깔았다. 오늘 별로 안 춥겠지? 침낭은 요 용도로 하나만 깔자. 침낭을 활짝 펴고 손으로 먼지를 털며 내가 말했다. 더스틴이 제 에어베개에 공기를 불어넣었다. 마트에서 삼천 원 주고 산 싸구려 베개…. 나는 점점 부풀어 오르는 에어베개를 슬쩍 바라봤다. 너 혼자 쓸 거야? 내가 너도 사라고 했잖아. 근데 필요 없다며. 공기를 불어넣는 주둥이에서 입을 떼고, 더스틴이 말했다. 치사하게…. 됐어. 베개 쓰면 어깨만 아파. 나는 배낭에서 스포츠 타월을 꺼내 돌돌 말았다. 이걸로 어떻게 되겠지.
“그럼 어디, 누워볼까요. 후후.”
궁둥이를 쭉 빼고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차게 식은 침낭이 내 몸을 맞이했다. 하루 종일 짐을 나른 내 가여운 등을 땅 위에 뉘었다. 잔디밭이라 푹신할 줄 알았는데 꽤나 딱딱하다. 아 좋다. 내가 말했다. 딱딱하지만, 그래도 누우니까 좋아. 이것도 집이라고 아늑하네. 바늘로 뚫어도 찢어질 이 천도 벽이라고 안심이 된다는 게 웃기다. 네온색 텐트 천 사이로 저무는 햇살이 스며들었다. 집에 다 왔다. 아늑하다.
쿵!
소리 들었어? 더스틴이 벌떡 일어나 물었다. 텐트 안에 엎드려 누워 일기를 쓰고 있는 참이었다. 그럼 들었지. 땅이 흔들릴 정도로 큰 소리였는데. 대포소리지? 더스틴이 다시 묻는다. 응 소리가 저렇게 큰 걸 보니…. 최전방 지역이라 훈련하나 봐. 아까 낮에도 계속 들리더니 밤에도 하나 보네…. 오늘 걷는 길 내내 군용 차량도 지나가고…. 지뢰 경고도 계속 보이고….
쿵!
“계속 이럴 건가.”
내가 말했다. '대포 소리가 들린다’라고 일기에 적었다. 희한한 일이야. 더스틴이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여기는 최전방이니까, 거의 매일 이렇게 총 쏘고 대포 쏘는 훈련을 할거 아냐. 근데 고작 차로 한두 시간 거리인 서울에서 살 때는 그런 생각 안 하고 살잖아. 그렇지,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내가 말을 받았다. 잊어버리고 사는 게 마음 편하지. 북한이 바로 위에 있다고, 곧 전쟁이 나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철원 땅에는 아직 제거되지 않은 지뢰들이 많다고, 그런 생각을 매일 하면서 어떻게 일상을 살아. 의식적으로 안 보고, 안 듣는 거지. 근데 사실은 이런 나라에 살고 있는 거지. 잊어버리고 있었을 뿐.
계속 일기를 썼다. 오늘 많은 일이 있었다,라고 적는다. 백마고지 기념관도 보고, 노동당사도 보고, 관광 온 할머니 할아버지분들도 만나고, 쌀 도정장에서 할아버지와 ‘치프’도 만나고, 짜장면을 먹고, 오덕리 도로가에서 할머니를 만난 후, 이 곳 캠핑장까지 왔다. 총 걸은 거리 17km. 소요시간 7시간 22분. 캠핑장에 텐트를 치고 엎드려 누워, 혹시나 모를 공격에 대비한 대포 훈련 소리를 들으며 맞이하는 이상한 저녁. 내일은 무슨 일이 있으려나. 누구를 만나려나. 아침에는 가지고 온 캠핑용 버너로 뭔가 해 먹어야지. 오늘처럼 물이 부족한 상황이 또 닥치면 안 되는데. 오늘은 운 좋게 유료 캠핑장을 찾았지만, 내일은 잠잘만한 공간을 수월하게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내일, 어디쯤 도달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