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노코도를 걷자 03
저녁 9시가 되었다. 거리 풍경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배낭을 챙겨 텐트를 치려고 점찍어 놓았던 소나무 밭으로 다시 가 보았다.
“너무 밝아. 가로등 불빛 바로 근처라.”
더스틴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아씨 어쩌지…. 해변 쪽으로 가볼까? 모래사장 있는 쪽으로. 내가 말했다. 해변가 쪽으로 가려면 스케이트 보드 타는 남자애들을 지나가야 해. 우릴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당연히 이상하게 보겠지. 이 늦은 시간에 배낭을 들고 해변가를 어슬렁거리는 남녀라니. 게다가 나는 인종도 다르잖아. 침착해. 긴장하면 괜히 더 수상해 보일 수 있어. 더스틴과 나는 매우 평범하며 전혀 수상하지 않은 사람인 척, 아주 당당한 발걸음으로, 하지만 발소리는 최대한 죽여가며, 학생들 옆길을 지나 모래사장이 있는 해변가로 갔다. 하지만 수상했겠지. 그게 아니면 촌스러웠거나.
모래사장 앞에는 바다가, 뒤쪽에는 키 큰 방둑이 있었다. 지진과 해일에 대비해 세워놓은 방둑인 듯했다. 이 방둑 아래 치자. 방둑 바짝 가까이 치면, 최소한 방둑 위로 지나가는 사람들 눈에는 잘 안 띌 거야. 더스틴이 말했다. 밤이 깊으면 해변가 거니는 사람도 없겠지. 텐트를 쳤다. 밤 10시였다.
텐트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더스틴이 텐트 지퍼 사이로 바깥 동향을 살폈다.
“아무 변화가 없어.”
음. 변화가 없단 말이지. 그러니까, 공원이 여전히 동네 주민들로 가득하단 말이지. 이 공원은 낮이나 밤이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인기 만점이란 말이지. 좋게 생각하자. 아무도 없는 공원이 더 위험할지도 몰라. 아, 몰라 몰라. 이럴 땐, 그냥 까무룩 잠들어버려야 해. 누가 우리 텐트 옆을 지나가든, 그래서 우리 텐트를 이상하게 쳐다보든, 내가 자버리면 바깥세상이야 어떻게든 시간이 흘러 흘러 아침이 될 테니까. 나는 몸을 옆으로 뉘어 작게 웅크렸다. 자자.
“…. 자?”
“아니.”
한숨을 푹 쉬다가 조용히 해야 한다는 게 생각나 입과 코를 가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은 점점 더 명료해진다. 아까 타나베행 버스 타기 전에 커피 마셨잖아. 그거 때문인 것 같아. 내가 말했다. 커피가 좀 세긴 했어…. 더스틴이 속삭였다. 아니 근데, 아무리 센 커피라도 오전에 마신 건데, 밤까지 효력을 발휘한단 말이야? 기분 탓일 거야. 자자. 양을 세자. 숨을 들이쉬자. 내쉬자. 하. 후. 하아아. 후우우우. 후우우우, 라고 내쉴 때 내 몸은 가라앉는다. 무거워진다. 후우우우. 점점 더 무거워진다. 빠져든다. 나는 잠에 빠져든다. 잔다. 잔다…. 젠장. 자긴 뭘 자.
11:00 PM
기타 소리가 들린다. 소리의 방향으로 가늠해 보건데, 방둑 위에서 나는 소리다. 아 씨 시끄러워. 잠 좀 자겠다는데…. 그래도 다행이다. 고성방가가 아닌 기타 소리라는 게. 밤의 해변가에서 기타를 치는 사람이 누굴 해치진 않겠지. 그리고 계속 듣고 보니 꽤 잘 친다. 조금만 더 듣다가, 자자.
12:00 AM
자정이다. 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오늘 밤, 잠에 들지 못할 것이다. 기타 치는 남자는 가버렸다. 음악이 사라진 공기 중으로 작은 말소리들이 스며들었다. 기타 소리가 들리던 곳과 반대 방향이다. 그러니까, 방둑이 아닌 해변가 쪽. 젊은 남녀의 말소리. 우리가 누운 텐트에서 약 50m 전방. 밤이 깊어지면 해변가를 거니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타나베라는 도시를 몰라도 한참 모르고 한 생각이었다. 어린 커플도 황당했겠지. 아무도 없겠지 싶어 어두운 해변으로 온 건데, 외계에서 떨어진 것 같은 이 이상한 연두색 텐트는 무엇? 나는 내 몸에서 나는 유일한 소리인 숨소리를 죽이고, (더스틴은 그 사이 죽어버렸는지 숨소리도 안 들린다) 그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두운 텐트 안에 누워 있으니 온 세상이 까맣다. 눈도 눈치도 없는 연두색 텐트가 된 기분이다.
커플은 설마 텐트 안에 두 사람이 이렇게 나란히 누워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조잘조잘 대화를 잘만 나눈다. 일본어가 짧아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느낌 상 오래된 연인은 아닌 것 같다. 남자가 말하면 여자가 깔깔깔. 여자가 말하면 남자와 여자 모두 깔깔깔. 자정이 지난 조용한 해변가에서, 비록 수상한 연두색 텐트가 지켜보고 있긴 하지만, 둘이 앉아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깔. 어둠 같은 아늑함. 파도 같은 간지러움. 아늑하고 간지럽게 이야기를 나누던 연인은 두 시간이 지나서야 자리를 떴다.
2:00 AM
아, 이 고통. 피곤함, 두려움, 지루함. 꼼짝 하지 않고 누워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좁은 텐트 안에서, 누가 텐트를 발견하는 건 아닐까, 우리를 해코지 하지는 않을까 긴장한 채로 밤을 새우는 이 고통. 그리운 호텔 다이아몬드.
어제 아침, 오사카의 호텔 다이아몬드를 떠나며 생각했지. 빨리 떠나자. 더럽고 냄새나는 이 곳. 찝찝한 이불. 엘리베이터고 화장실이고 방 손잡이에서고 나는 묵은내. 일본에서 가장 싼 호텔로 CNN 소개되어 얼떨결에 유명세를 탄 싸구려 호텔. 오늘 아침 체크아웃을 하며 기뻐했었지. 하지만 나는 예감했어야 한다. 오늘 밤 그 호텔 다이아몬드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란 걸. 아무리 허름하고 불결한 호텔도 초겨울 해변가의 야영에 비한다면 100배는 낫다는 걸. 그 야영지가 도시 한가운데의 공원이라면 더군다나.
커플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그룹이 해변가로 왔다. (해변에 차례로 입장하는 번호표라도 있는 것일까?) 목소리를 듣자 하니 중년 그룹이다. 어린 연인들이 앉아있던 자리보다 더 가까이 와 있는 듯하다. 아주머니 둘과 아저씨 셋? 아니, 아저씨가 둘인가? 이 깊은 밤에 해변가에 모여 뭘 하는 걸까.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은 내용을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해변을 거닐었다. 말소리가 저만큼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멀어진다. 가까워진다. 가까워진다. 더 가까워졌다. 이거, 너무 가까운 거 아닌가? 발자국은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이내 발아래 모래 알갱이가 서걱거리는 것처럼 곁으로 다가왔다. 텐트를 본 건가? 텐트에서 바로 한 발자국 앞일 것만 같은 가까운 거리,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뭐라고 하는 걸까. 울고 싶다. 야이씨 나 울고 싶어, 우리 뭐 하는 거야 여기서,라고 더스틴에게 칭얼대지도 못하는 이 답답함. 나는 왜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가. 아니, 하지 못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지. 이 텐트 뭐야? 가위로 잘라서 안에 든 사람들을 먹어버릴까? 따위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 지도 몰라. 가슴이 쿵쾅댔다.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침낭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터다. 우리는 누운 상태에서 단 1mm도 움직이지 않기 위해 숨을 죽였다. 한 시간 후, 중년의 무리들은 고맙게도 우리를 잡아먹지 않고 해변을 떠나 주었다.
3:00 AM
오토바이 소리. 부아앙! 부아앙아아아아앙! 폭주족들은 우리 텐트가 놓인 방둑 옆 공원을 중심으로, 도시 저 멀리로 부아앙! 하고 멀어졌다가 부아아아앙! 하고 다시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텐트 안에 깔린 두꺼운 어둠 위로, 짙고 깊은 공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부아아아앙! 다시 공원으로 모여든 폭주족. 이야기를 시작한다. 고등학생쯤 되었을 것 같은 목소리다. 그렇다면, 비행청소년? 어렸을 때 성수동 밤거리를 휘젓고 다니던 폭주족들이 떠올랐다. 즐겨보던 일본 만화책에 나온 일본 비행청소년들도 떠올랐다. 일본 비행청소년은 어떤 존재일까?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무섭다. 공포는 극에 달했다. 그들의 주행은 새벽 4시까지 계속되었다. 근처를 배회하던 잠도 멀리 달아나버렸다. 나는 너무나도 영롱한 정신 속에서 일본 비행청소년들의 말소리, 오토바이 배기통 소리, 낄낄대는 웃음소리를 들어야 했다. 텐트 근처로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도 같았다. 그러더니,
“아우우우우우울!”
급기야는 늑대의 포효소리. 텐트를 본 것일까. 우리가 듣고 있다는 걸 알고 골려주고 싶은 걸까. 아아, 우리는 왜 일본까지 와서 이딴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 걸까.
새벽 5시가 되어서야 까무룩 잠에 들었지만, 너무 추워서 30분 만에 깼다. 이가 드드드드드, 떨렸다. 밤손님들이 사라진 공원으로 부지런한 아침 손님들이 모여들었다. 주인과 산책을 나온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우리 냄새를 맡았는지 자꾸만 코를 킁킁댄다. 개야, 제발 그냥 가줘. 우린 이미 충분히 힘들거든.
일어나자. 해 뜨면 또 해 떴다고 공원으로 모여들어 조깅하고 산책할 사람들이 더 들이닥치기 전에 텐트를 말아버리자. 텐트 외부는 새벽이슬에 흠뻑 젖어있었다. 젖은 텐트를 나무에 걸어놓고, 어제 남은 마른 빵에 바나나를 끼워 먹었다.
“오늘은 어디서 자?”
입을 오물대며 더스틴이 물었다.
“…. 내가 아냐?”
우리는 바나나를 씹으며 햇살 아래 은색으로 물든 바다를 바라봤다. 오늘은 쿠마노코도 순례길이 시작되는 타키지리로 간다. 우리가 떠난 오기가하마 해변엔, 오늘 밤에도 사람들이 모여들겠지. 열한 시엔 기타를 치고, 열두 시엔 연애를 하고, 새벽 두 시엔 중년의 무리가 모여들어 일탈을 하고. 그렇게 새벽 네 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십 대의 시간이 찾아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