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노코도를 걷자 08
쿠마노코도의 숲은 마치 일본과 같다. 일본처럼 가지런하고, 깔끔하다. 길고 곧게 뻗은 나무. 자로 잰 것처럼 일정한 나무들 사이의 간격. 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하얀 햇살의 간격까지 규칙적이다. 이런 숲에서라면, 나 같은 길치도 길을 잃을 일이 없다. 500m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거리 표시, 혹은 이따금 등장하는 오지(Oji)를 확인하며 앞으로 갈 거리와 지금 나의 위치 등을 가늠해볼 수 있다. 그러니 불안할 일이 없다. 한데, 불안이 없으니 어째 조금 심심하다.
“숲이라면 뭔가 좀…. 어수선하고 아무렇게나 막 자라난, 그런 맛이 있어야 하는데. 여긴 뭐랄까…. 너무 깔끔해. 숲 치고.”
삼나무 숲을 지나며 내가 말했다. 쿠마노코도의 숲에는 나무가 종류별로 심어져 있다. 그래, 이건 ‘심어져’ 있는 거다. 삼나무길에는 삼나무뿐이고, 참나무 길에는 참나무뿐이다. 나무도 곧고 잘 뻗은 나무들만 있다. 조림 공사를 하는 구간도 종종 보인다. 못난 나무, 혹은 간격이 맞지 않는 곳에 자라 버린 나무를 잘라내고 다시 심나 보다.
“나는 뭔가…. 삼나무길의 참나무, 참나무 길의 삼나무 같은 사람이라 그런가. 잘 뻗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자라 버린 존재라 그런가. 이렇게 정리정돈이 된 숲길을 걷고 있자니, 묘하네.”
내가 말을 이었다. 타키지리 마을에서 정성 들여 사는 삶의 태도에 감탄을 하고 온 참이지만, 숲에 오니 다시 갸우뚱하다. 이 세상을 내 생각대로, 계획대로, 정리 정돈하겠다는. 질서를 부여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길이다.
“여기는 꼭 한국의 주산지 같다.”
더스틴이 말했다. 세 시간을 걸어 타카하라 이케 호수에 도착했다. 호수 주위로 가을이 짙게 물들어있다. 잔잔한 호숫가 위로 낙엽이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휘어져 자라난 소나무, 그리고 어디서 뻗어 나왔는지 모를 헝클어진 머리카락 같은 나무줄기가 호숫가 위로 고개를 쑥 내밀고 제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 그 사이에 마구 찢어 뿌려놓은 듯한 하얀 구름 조각이 둥둥 떠 있다. 어지러운 풍경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해진다. 가지런함, 질서 정연함 사이에 조용히 자리 잡은, 무질서한 가을의 풍경.
“이제 몸이 리듬을 좀 탄 것 같아.”
주조 오지부터는 오르막길이다. 나무뿌리가 드문드문 섞여있는 오솔길, 차곡차곡 나 있는 계단길,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 이따금 나오는 아스팔드 길. 걷고, 걷고, 또 걷다 보니 살아났다. 잠시 숨죽여 놓았던 내 몸 안의 걷기 리듬이.
“멋있네. 이 정도 걷고 여기서 차를 마셨으면, 정말 맛있었겠다. 딱 좋은 위치네.”
더스틴이 말했다. 우와다 자바 티하우스에 도착했다. 해발고도 690m. 오늘 걸을 길 중 가장 높은 곳이다. 티하우스라고 해서 찻집이 있는 건 아니다. 예전에 찻집이 있던 자리일 뿐. 황실 가족, 귀족, 비구니들이 이 곳을 순례하던 옛날 옛적. 이 곳에 앉아 발을 쉬이며 차를 마셨겠지.
“어쩜, 이렇게 아무도 없니. 네가 그랬잖아. 여기가 전 세계에 딱 2개 있는 유네스코에 등록된 순례길 중 하나라고. 스페인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랑, 여기 일본의 쿠마노코도.”
내가 말했다. 커피 케야키를 나선 이후로 단 한 명의 인간도 만나지 못했다. 숲 속엔 나와 더스틴뿐이다. 치카츠유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잠시 앉았다.
“응 맞아. 세상에서 제일 덜 알려진 순례길 중 하나지.”
오후 4시다. 초겨울이니 한 시간 후면 해가 넘어가버리겠지. 오늘은 여기까지만 걷자. 더스틴이 말했다. 날이 조금이라도 밝을 때 잠잘 곳을 찾아봐야지.
치카츠유 마을로 내려가는 길. 해가 산 너머로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숲길을 다 내려 도로를 건너니 마을이다. 산이 둘러싸고 있는 고요한 마을이다.
“고요해. 너무 고요해서 무서울 정도야.”
내가 말했다.
“숲이라 사람이 없는 건 줄 알았는데, 마을로 나와도 사람이 없네.”
시간이 없다. 밥, 그리고 잠잘 곳. 이 두 가지를 해가 꼴깍 넘어가 날이 새카매지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 자, 지도를 보자.
“공원이 있다. 우체국도 있고….”
내가 말했다.
“우체국은 무슨 소용이지?”
“뭐…. 이렇게 아무도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누군가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나 할까. 야, 마트도 있다.”
“초등학교, 고등학교…. 고등학교 옆에는 묘지도 있네.”
“묘지….”
“일단 이 공원 쪽으로 가보자.”
공원은 쿠마노코도 나카헤치 미술관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젯밤 타나베 해변 공원에서 지새운 공포의 밤을 생각하면 다시는 공원에서의 야영은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정도면 양호하네. 공중 화장실도 있고.”
더스틴이 말했다. 나도 마음에 들어. 내가 말했다. 타나베의 해변가 공원과는 많이 다르다는 게 마음에 들어. 밤새도록 죽치고 앉아있는 사람들도 없고. 아니, 사람은 커녕 생명체 자체가 보이질 않으니…. 마치, 이 마을 전체에 우리 말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 A-Coop 마트로 가보자. 가다가 식당 나오면 들어가고.”
A-Coop이라는 이름 왠지…. 좀 큰 마트일 것 같지 않니? 후후…. 마을길을 걸으며 내가 중얼거렸다. 마트도 좋지만, 식당이 나오면 정말 좋을 것 같아. 더스틴이 말했다. 오늘 잠자리가 추울 테니까, 추운 잠자리 들기 전에 몸도 데우고, 딱딱한 땅바닥에 눕기 전에 편한 의자에 조금이라도 앉아있으면 좋잖아. 배도 든든히 채우고.
“한 바퀴만 더 돌아보자.”
더스틴이 말했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난 우리의 얼굴엔 낙담과 자책과 불안감이 고루 섞여있었다. 식당은커녕 지도에 약속되어있던 A-Coop도 보이지 않았다. 오사카에서 비상식량을 챙겨 왔어야 하는데. 우리는 대체 언제 배울 런지. 여행은 예상치 못한 상황의 연속이라는 것을. 예상한 불행은 예상대로 일어나며, 그에 더해 예상하지 못한 불행까지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렇게 아무것도 없어…. 애초에 식당이 있을 거라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지도에 표시된 상점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내가 중얼거렸다. 거리는 이미 어두컴컴해져 버렸다. 식당도, 상점도 없는 거리엔 조용히 아무 말이 없는 작은 집들만 드문드문 서 있다.
“빛”
내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빛이 보여. 저 먼 심연같이 검고 짙은 어둠 속에 빛나는 작은 점. 너무 눈이 부셔 아주 가까이 가야만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밝은 빛과 까만 어둠이 섞인 중간 지점에, 빨간 바탕의 하얀 글씨가 쓰여 있었다.
たばこ
“타바코! 담배! 담배를 판대! 가게인가 봐.”
우리는 종종걸음으로, ‘타바코’라고 써진 밝은 빛을 향해 걸어갔다. 여닫이 문을 밀어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만큼 작고 마른 아주머니 한 분이 가게 한 구석에 앉아있었다. 어두운 밤 찾아온, 전혀 예상치 못한 손님에 조금 놀란 표정이다. 헬로우, 내가 인사하니, 아주머니가 미소를 지어주셨다.
“바로 먹을 수 있는 걸로 고르자. 조리는 힘드니까.”
더스틴이 말했다. 나는 카레맛 사발면을 골랐다. 뜨거운 물은 부어주시겠지…. 단팥빵. 크래커도 하나 챙기자. 내일도 먹을 걸 구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맥주.”
더스틴이 덧붙였다.
“맥주? 지금 이 상황에 맥주를 마시자고?”
“응.”
“낯선 마을 공터 한구석에서 밤을 지새워야 하는데? 제정신이 아니거나, 제정신을 잃고 싶은 거구나?”
“너무 긴장되니까 그래. 좀 릴랙스 할 필요가 있어.”
“뭐…. 그래. 초라한 저녁 식단이니 맥주라도 한 모금 하자.”
아주머니에게 몸짓으로 카레라면에 부을 뜨거운 물을 부탁했다. 봉지에 맥주 두 캔과 빵, 크래커를 담았다. 가게 건너편, 가게의 밝은 빛이 닿는 버스정류장 벤치가 있었다. 벤치에 앉아 식량을 풀었다. 카레라면은 맛이 좋았다. 사발면 그릇을 더스틴에게 넘긴 후 단팥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맥주 한 모금. 맥주 사길 잘했네. 내가 말했다. 잠자리에 대한 불안한 마음, 사발면과 빵 따위로 배를 채우는 초라함이, 그나마 맥주 덕에 좀 가라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