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든 걷는다: 그리고 마신다 (3)
남편 D와 나에겐 공통점이 많다. 영화나 음악 취향도 비슷하고, 호기심이 많고, 그래서 여행을 좋아하며, 그렇다고 뻔한 데 가서 남들 다 하는 뻔한 짓 하는 건 싫어서 아무도 안 가는 구석진 곳을 여행하며 생고생하기를 좋아한다. 맥주를 좋아한다. 개를 좋아한다. 고양이도 좋아한다.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한다. 커피 취향은 조금 다른가? 나는 라떼를 선호하고 D는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다. 그러고 보니 완전히 다른 것도 많다. D는 게임을 좋아하고 나는 게임을 아주 싫어한다. D는 콩을 좋아하는데 나는 싫어한다. 주로 요리하는 쪽은 D라 D는 제멋대로 콩요리를 자주 하는데 또 잘 만들면 맛있어서 나도 맛있게 먹기도 하고….
아무튼, 비슷한 점도 많고 다른 점도 많은 D와 나지만, 둘 다 좋아하는 거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걷기다.
우리는 많은 걸 걸으면서 했다. 첫 데이트가 뭐였는지 뒤돌아보면, LA 그리니치 천문대를 걸어 올랐던 그때였던 것 같다. 사귀면서도 온갖 데를 걸어 다녔는데 결혼을 한 후에는 더 가관이었다. 집을 빼고 직장을 그만두고 지구 반대편으로 가서 몇 개월 씩 걸을 만큼, 마치 걷는 데 미친 두 사람처럼 전국 방방곡곡을 넘어 세계 방방곡곡을 걸어 다녔다.
그러고 보니 D와 내가 결혼하기로 한 것도 걸어서 올라간 산 위에서다.
용산에서 살던 때였다. 아, 정정한다. D가 용산에서 살았고 나는 성수동에 있는 부모님 집에서 살 때였다. 당시 우리는 반동거를 하고 있었다. 주말이면 늘 함께 용산 집에 있었다. 어느 주말. 날이 좋았고, 날이 좋은 만큼 더욱 게으름을 피우기 딱 좋은 날이었다. D의 배를 베고 누워 빈둥대고 있는데, D가 산에 가자고 했다. 한창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토요일 한낮에 기어코 일어나 샤워를 하고 산에 가는 건 썩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걷기에 환장한 나라도.
“빨리 일어나. 가자. 가자고!”
게으름을 피우다 지겨워져서 어서 밖에 나가자고 보채는 건 주로 나인데. 그 날 따라 D가 나를 보챘다. 어쩔 수 없이 대충 옷을 갈아입고 버스를 탔다. 그리고 삼청동으로 갔다. 우리가 좋아하는 북악산으로 가기 위해. 북악산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산이다. 시내 한복판에 있고, 험하지도 않고, 경치도 끝내주며, 걷는 길도 매우 좋다. 그리고 다 걷고 나서 끝내주는 치맥을 할 수 있다. 방바닥에서 일어날 때만 힘들었지, 산에 도착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산은 좋은 곳이야.
“여기서 잠깐만 쉬다 가자.”
산자락에 발을 디디니 도토리를 발견한 날다람쥐처럼, 물 만난 장어처럼 마구 몸을 움직여 산을 뛰어오르고 싶어서 몸이 간질간질한데, D가 나를 멈춰 세웠다. 쉬긴 뭘 쉬긴? 이제 막 걷기 시작해서 발에 발동 걸렸는데. D를 나무랐다. 잠깐만 쉬자. 긴장이 되어서 그래. D가 쉬자고 멈춰 선 곳에는 철봉과 벤치가 있었다. D가 철봉을 보더니 봉을 붙잡고 턱걸이를 했다. 뭐하냐 거기서? 웬 안 하던 철봉을 하고 지랄이야? 턱걸이를 다섯 번 정도 하는 듯 마는 듯하다 내려온 D가 이번에는 팔 벌려 뛰기를 하기 시작했다. 뭐냐 너 진짜? 아침에 뭐 잘못 먹었냐?
“나랑 결혼해줄래요?”
성곽 너머 서울 한복판이 내려다보이는 북악산 정상 즈음, D가 나에게 말했다. 아, 뭘 잘못 먹은 게 아니라 이 말을 하려고…. 어설픈 한국말을 천천히 내뱉은 D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쪽지였다. 펴봐. D가 말했다. ‘나랑 결혼해줄래요?’라는 한국어 문장이 어설픈 글씨로 적혀있다. 한국인 직장 동료가 알려준 문장을 받아 적었단다. 그가 다시 뭔가를 꺼냈다. 반지다.
“와 예쁘네. 고마워. 그래. …. 하자! 결혼!”
“근데 너 왜 안 울어?”
“내가 왜 울어야 하는데?”
“내가 이렇게 청혼을 하는데, 왜 안 우냐고. 감동적이지 않아?”
“아니 뭐.... 그래 뭐, 감동적인데…. 이미 하기로 한 거였잖아. 사실 이 반지도 지난주에 싸울 때 네가 공개해 버렸고. 서로 몰랐던 사실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긴장해?”
“당연히 긴장하지. 나름 준비도 많이 했단 말이야.”
D가 배낭을 열었다. 샌드위치와 치즈, 와인, 그리고 작은 플라스틱 컵 두 개.
“나름 귀엽네? 새끼….”
플라스틱 컵에 보랏빛 와인을 반 잔씩 따라 건배를 했다. 공기 좋은 산 정상에서 마시는 와인 맛은 끝내줬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가끔 쳐다봤지만, 개의치 않았다. 와인 한 병을 다 마시고, 취기에 더 아름다워 보이는 서울 전경을 바라보며 실실거리다, 산에서 내려와 부암동으로 가서 미친 듯이 바삭한 치킨과 감자튀김에 생맥주를 마셨다.
아, 역시. 등산 후에 마시는 차가운 맥주란.
돌이켜보면, 북악산에서 프러포즈를 받았던 그 날이 D와 나의 결혼생활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날이 아니었을까.
미친 듯이 걷다, 와인을 마시고, 다시 미친 듯이 걷다, 차가운 맥주를 마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