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 배웠다. 걷고 마시는 술이 꿀맛이라는 걸.

어디든 걷는다: 그리고 마신다 (2)

by 두지



내 또래 친구들이 어렸을 때 나와 다른 여가 시간을 보냈다는 걸 안 건 성인이 되고 나서였다. 외식은 돈가스와 콘수프가 나오는 경양식집. 주말이면 가족여행 혹은 놀이공원. 나는 어땠냐고? 외식은 곱창이나 철판 낙지집. 주말이면…. 아차산.


돌이켜보면 우리 가족은 산을 정말 많이 다녔다. 나의 엄마 아빠는 주말에는 뭔가 활동적인 걸 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가진, 열성적이거나 열의에 찬 성격이 절대 아니었다. 주말이면 조금 쉴 만도 했다. 당시에는 주말이 이틀이 아니었고 고작 일요일 하루뿐이었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한데 우리 가족은 늘 산에 올랐다. 다시 말하건대, 열성적인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에 버스나 기차를 타고 저 멀리 설악산, 지리산 같은 데를 간 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이 주로 오른 건 집 근처 아차산이었다. 멀리 가봤자 지하철을 타고 관악산에 가거나, 성남 할머니 집에 갔다가 오르는 남한산성 정도.


산자락에 도착하면 오전 11시 즈음이었다. 아차산은 3시간 정도면 오르내릴 수 있는데, 그 시간 즈음에는 등산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 일찍 산에 올라갔다가 오전 중에 내려와서 맛있게 점심을 먹으니까. 우리 가족은 아니었다. 우리는 늘, 산에서 내려오는 다른 가족들을 거슬러, 반대 방향으로 산을 올랐다.



아차산 5.jpg 어렸을 때 주말에는 늘 아차산에 갔다.



발에 힘을 주고 걸으면 미끄러지지 않는다.


산에 따라가기 시작한 여섯일곱 살 무렵에 아빠가 준 팁이다. 아빠 말대로 발에 힘을 주니 정말 발이 산길 위에 철썩철썩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아차산은 발에 힘을 주고 걸어야 하는 가파르거나 미끄러운 길이 거의 없는, 수월하게 오를 수 있는 산이지만, 아빠의 팁은 그 뒤로부터 내내, 서른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내가 잘 걸을 수 있는 팁이 된 것 같다. 우리 아빠의 팁을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전수한다. 발에 힘을 주고 걸어라. 그럼 안 미끄럽다.


아빠의 말을 따르며 열심히 산을 따라다니다 보니, 나의 산 타기 실력은 나날이 늘어갔다. 나에게는 두 살 터울의 오빠가 있는데, 어느새부터 나는 오빠보다 산을 잘 타게 됐다. 어렸을 때 내가 오빠보다 산을 잘 탔다는 말에 오빠는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내가 오빠보다 산을 훨씬 잘 탄다. 오빠는 십여 년을 한 회사에서 성실히 일해 온 사람이고, 나는 중간중간 회사를 뛰쳐나와 히말라야를 오르거나 국토종단을 하거나 제주도를 한 바퀴 걷거나….


어느 날 아차산을 오르다 다소 가파른 짧은 구간의 내리막길이 나왔다. 8살 남짓이었던 오빠는 무섭다고 내려가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오빠를 비웃으며 내리막길을 마구 뛰어 내려갔다. 가속도가 붙어 마구 달리다, 건너편 나무에 두 손바닥을 쿵 찌기를 반복했다. 오빠! 이렇게 하면 돼! 이것도 못 하냐? 오빠를 놀리며 그 비탈길을 열 번은 뛰어내렸던 것 같다. 그때 오빠는 내가 얼마나 얄미웠을까….


아차산은 해발고도가 고작 200m밖에 안 되는 낮은 산이다. 그래도 정상에 오르면 기분이 좋다. 요새도 산 정상에 올라 ‘야호!’하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나? 내가 어렸을 때는 다들 그랬다. 허파 아래 끝에서부터 공기를 끌어올려 외쳤다. “야호!” “오빠 바보!” “오빠는 겁쟁이!”

그때 오빠는 내가 얼마나 얄미웠을까….



아차산 4.jpg 어렸을 때 아차산에 그토록 많이 오른 덕에, 지금의 체력이 생긴 게 아닐까.... 사진은 소백산.


우리 가족은 산에 도시락 따위는 싸 간 적이 없다. 일찍 일어나 도시락까지 쌀만큼 열성적이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아빠가 술을 좋아해서, 산 위에서 뭘 먹기보다 하산 후 안주를 곁들여 술 한잔하기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하산 후 술을 들이켜는 아빠의 표정을 보며, 어렸던 나는 짐작했던 것 같다. 열심히 걷고 마시는 술은 꿀맛이구나. 정상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먹는 술 없는 도시락보다, 산에서 내려와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플라스틱 테이블에서 먹는 도토리묵과 막걸리가 훨씬 맛있는 거구나.


아차산 자락에서 도토리묵 참 많이 먹었었는데. 지금도 있을까? 도토리묵 집. 조만간 다시 아차산에 올라야겠다.



아차산 7.jpg 아빠의 표정을 보고 짐작했다. 정상에서 먹는 도시락보다, 하산하고 먹는 도토리묵에 술 한잔이 훨씬 맛있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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