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을 걷자, 그리고 얼음 정종을 마시자

어디든 걷는다: 그리고 마신다 (4)

by 두지



D와 결혼한 후 처음 터전을 잡은 곳은 성북동이었다. 9평짜리 작은 오피스텔이었는데, 8개월 정도만 살다 장기 여행을 떠날 계획이었어서 가구도 들이지 않았다. 아무리 8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살림살이가 거의 없이 지내는 건 그리 쉽지 않았다. 유쾌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신혼이라는 시기에 어울리지 않게 점점 우울해져가고 있었다. 우리를 붙잡아준 건 성북동 산책길이었다.



낙산공원


오피스텔 건물에서 길만 건너면 낙산공원 초입이었다.


성곽과 꽃나무를 따라 길을 오르면 골목골목 작은 집들이 보인다. 그러다 얼마 가지 않아 성곽 안 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이 나온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서울 시내 전경이 훤히 보인다. 그 길이 얼마나 좋던지.


성북동에서 살기 시작한 게 4월부터니까, 그 뒤로 8개월 동안 낙산공원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겪었다. 봄이면 목련과 벚꽃, 개나리가 만발했다. 여름이면 성곽에 걸터앉아 기타를 치거나 데이트를 하는 대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요즘도 그런 거 하나?) 가을이면 단풍이, 겨울이면 하얗게 쌓인 눈이 성곽을 예쁘게 장식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각에 오르는 낙산공원은 다 나름대로 아름다웠지만, D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낙산공원은…. 밤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하루가 가 버리고 밤이 되면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러면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열면 조명이 밝히는 혜화문이 보였다. 노란 조명 빛을 입은 혜화문은 정말 예뼜다. 그런 혜화문을 보고 있으면 당장에 나가서 밤길을 걷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다행히 길만 건너면 낙산공원이고, 낙산공원은 밤에 제일 아름답다. 우리는 그렇게, 밤만 되면 홀리듯이 밖으로 나가 낙산공원을 걸었다.


성곽을 따라 주욱, 노란 불빛이 켜져 있는 밤의 낙산공원. 꽃구경, 단풍 구경, 데이트를 하러 왔던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D와 나만 남은 산책길. 그 산책길을 걸으며, 이런 대화를 했던 것 같다.


우리는 어쩌자고 아무런 계획도 없이 결혼부터 했지?

결혼을 하려면 평생의 계획은 아니더라도, 당장에 어떻게 살 건지에 대한 단기 계획 정도는 가지고 결혼했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

우리가 가진 계획이라고는 몇 개월 후에 인도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 밖에 없어.

근데 믿겨?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로 떠난다는 게.

어떨 것 같아, 인도?

글쎄, 도저히 감을 못 잡겠어.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과, 조금의 설렘. 방향도 결론도 없는 이런저런 말을 지껄이며 낙산공원의 밤공기 속으로 우리의 감정들을 쏟아부었다. 그러면 조금 후련해졌다. 그리고 그다지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되돌아봐도 그렇다. 정말, 그 시절은 그다지 나빴던 것이 하나도 없었어.



길상사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지내면서 어떻게 도를 닦지?”


길상사의 작은 냇가를 따라 안쪽으로 쭉 들어가면, 냇가 위로 작은 나무집들이 보인다. 길상사에 처음 간 날, D가 저 예쁘고 아담한 집들은 뭐냐고 물었다. 스님들이 지내는 처소라고 하니 깜짝 놀란다. 스님들은 세속의 욕심을 버린 사람들 아니야?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이 곳에서 지낸다고?


D가 놀랄 만도 하다. 길상사는 서울 시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가 아닐까.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이, 길상사는 한 때 정치계 인사들이 모여들던 유명한 요정이었다. 백석 시인의 애인으로 유명한 요정 주인 김영한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요정을 시주하겠다고 했지만, 법정 스님은 이를 거절했다. 그렇게 10여 년 동안 권유와 거절이 반복되다 결국에는 시주를 받아들였다. 당시 시가가 1000억 원이었다는데, 김영한은 “그까짓 1000억 원은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내 평생 1000억 원을 시주할 일도, 그만한 돈을 모을 일도 없겠지만, 가끔 길상사에 와서 천천히 걷다 나무마루에 앉아 스님들의 아름다운 처소를 바라보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다음에는 백석의 시집을 길상사에 들고 와 천천히 읽는 사치를 누려봐야겠다.





성북동 산책 후 먹고 마실 곳은 참으로 많다. D와 내가 자주 가던 몇 곳만 소개하자면….


혜화 칼국수


한성대입구역에서 혜화동 방향으로 걷다 보면, 골목길 중간에 ‘혜화칼국수’라는 오래되어 보이는 간판이 보인다. 딱 봐도 노포의 포스가 느껴진다. 그 포스를 믿고 식당으로 들어가라. 제발. May the force be with you.


혜화칼국수에는 끝내주는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생선 튀김, 김치, 칼국수다. D는 해산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집 생선 튀김은 그런 D의 입맛도 충족시킬 만큼 바삭하고 맛있고 따뜻하고…. 그리고 김치가 얼마나 맛있는지. 다음에 가면 혹시 김치를 따로 살 수는 없냐고 물어보고 싶다. 진한 사골 육수에 끓은 따뜻한 칼국수에 김치를 곁들여 한입 먹고, 바삭한 생선 튀김을 또 한입 베어 물고, 차가운 소주를 한 모금 마시면…. 이 곳이 극락이다.



생선 튀김.JPG 나오자마자 먹느라 바빠 사진은 별로지만... 믿어라! 맛있다!


참나무 닭나라


한성대입구역에서 성북천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참나무가 잔뜩 쌓여있는 식당이 보인다. 그 참나무로 장작을 펴 닭을 굽는다. 맛있다. 그리고 친절하다. 우리가 성북동에 살 때만 해도 동네 사람들이 자주 가는 집이었는데, 요새는 TV에 몇 번 소개되어 더 유명해진 듯하다. 산책하다 맛보는 참나무에 구운 닭에 생맥주 한 잔? 말해 뭐하나.


오뎅바


성균관대 근처 대로변에 ‘오뎅바’라는 심플한 이름의 술집이 있다. 2차로 완벽한 곳이다.


오뎅바를 좋아하는가?라고 물으면 대부분 그렇다고 한다. 나도 오뎅바를 좋아한다. 근데 주위의 오뎅바는 점점 사라져만 간다. 팔아봤자 수익이 안 나거나 손이 너무 많이 가나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혜화동 오뎅바는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곳에 왔다면 첫 잔은 정종으로 시작하는 게 좋다. 걷고 힘들어 정종보다는 시원한 게 당긴다고? 걱정하지 마라. 이 곳에는 아주 차가운, 살얼음이 동동 뜬 얼음 정종이 구비되어 있다. 살얼음 정종에 오뎅 국물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이 곳에서는 오뎅을 씹으며 사장님의 연애 상담을 듣는 게 꿀맛이다. 사장님은 중년의 여성분이신데, 웬만하면 성균관대 다니는 학생들을 다 아시는 듯하다. 그들의 연애 고민을 듣고 조언을 해 주시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아, 좋은 시절.



오뎅바.JPG 이것도 사진은 별로지만... 맛있고 분위기도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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