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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여름 Feb 07. 2024

누가 칼을 들고 협박하지는 않았지만

공무원이 월급이 적다고 불평하면 밖에서는 ‘누. 칼. 협. ’이라며 조롱받고 집에서는 고된 부서에 들어가 빨리 진급할 생각을 하라고 혼이 난다. 공무원 월급이 적은 줄이야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고 국가에 대한 대단한 봉사심이나 사명감보다는 내 능력으로 취직할 수 있는 곳 중에 괜찮아 보이는 곳을 골랐다. 성적에 맞춰서 대학을 지원하는 인생이 어디 한둘이랴. 나에겐 직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평생 직장인이었던 아버지는 승진이 느리면 돈도 적게 벌고 후배들에게 무시를 당하기 일쑤라며 자식들의 빠른 승진을 바랐지만 나는 저녁이 있는 삶이 중요한 미생일 뿐이다.

“결혼을 안 할 거면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지.” 아버지는 결혼을 하지 않을 거면 돈이 많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갸우뚱했다. ‘입 하나만 풀칠하면 되는데 왜?’ 자녀 1명을 대학 졸업 때까지 양육하는데 평균 4억이 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벌써 4억을 아낀 셈이다. 학군을 따져가며 집을 살 필요도 없으니 없는 월급에 무리할 필요도 없고 몇 억을 투자한 자식이 내 노후를 책임진다는 보장도 없다. 더군다나 아버지 세대에서나 기대할 법한 남자가 집을 해 오거나 아내를 부양할 것이라는 신데렐라 마인드는 구시대의 환상일 뿐이다.


아버지가 마르고 닳도록 말씀하셨던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처럼 주는 것이 있으면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배우자가 나를 먹여 살리면 상대는 깨끗한 집과 따뜻한 밥상을 기대하게 되어있다. 세상에서 돈이 돌아가는 이치가 그런 것이다. 몸이 고될지라도 제 입의 풀칠은 스스로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혼자서 산다고 해서 더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돈은 언제나 중요하다. 돈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돈에 미친 사람이라고 했다. 행복을 돈으로 살 수는 없다고 하지만 돈이 없으면 불편하고 그것이 반복되면 불행해진다. 매주 로또를 사는 친구에게 당첨이 되면 무엇을 할 것인지 물었다.

 “집사고 차 사고 하면 끝일 거 같은데? 넌?”

“난 일단 32평 신축아파트를 하나 사고 GV80 뽑고 명품 백 4-5개 정도 사고 그다음엔… (생각 중) 없는데?”

돈도 있어 본 놈이 쓰지 평생 검소하게 살아온 우리는 돈이 많다 해도 딱히 쓸 곳을 몰랐다. 하지만 집과 차를 살 돈은 필요하다는 데에는 의견이 모아졌다. 명품 가방이야 사치품이니 없으면 속이 좀 상하는 데서 그치지만 꼭 돈이 필요한 곳이 있다.


버지니아울프는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녀가 사망한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에서 '현대 비혼여성에게는 자기만의 집이 필요하다'라고 감히 주장을 해보겠다. 소음에 시달리지 않는 공간, 부모의 다툼을 견디지 않아도 되는 공간 속에서 정서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혼자서 온전히 쉴 수 있는 집이 필요하다.

또 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일 뿐 아니라 행동의 제약을 없앤다. ‘내가 거길 어떻게 가, 너무 먼데’ 따위의 부정을 파괴하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범위를 넓힌다. 다른 지역에 윈드서핑을 배우러 가거나 산속과 바다에서 계절을 맞이하는 일은 일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그리고 앞으로 또 어디에 돈이 필요할까? 내가 아플 때 쓸 병원비와 간병비, 각종 공과금을 밀리지 않을 돈, 학원 등록비, 제철 음식을 망설임 없이 사 먹을 수 있는 돈이 필요하다. 값비싼 과일이 맛없을 수는 있지만 값싼 과일이 맛있을 리는 없다. 적정한 수준의 서비스를 받고 좋은 음식을 먹는 데에는 그만한 값을 지불해야 한다. 싼값에 누릴 수 있는 양질의 서비스는 한정적이므로 즐거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퇴직을 한 뒤 얼마의 돈이 필요한지 계산해 보았다. 내 나이를 기준으로 기대 여명 은 87.1세이다. 60세에 정년퇴직을 한다면 최소 30년 동안 먹고살 돈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 적정 노후 생활비의 평균은 163만 원 정도이니 직장에서 나오고도 죽을 때까지 5억 8천7백만 원을 써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서 상당 부분 기여금을 공제하니 얼마간의 연금을 받을 테지만 모아야 할 돈이 막막하다.


혼자서 살면 내가 버는 돈 이상의 요행을 바랄 수 없다. 재테크에 대해 의논할 사람도 없고 답답한 나의 재정 상태도 오롯이 나의 몫으로 남는다. 하지만 배우자의 실수로 인해 애써 모은 돈을 날릴 염려가 없으므로 재정을 계획하는 데 있어 비교적 변수가 적다. 어디에 쓰고 어디에서 줄일 거냐에 관한 가치관을 타협할 일도 없으니 혼자 버는 돈이 적다고 슬퍼할 일만도 아니다.


남자 이야기로 시시덕 거리던 친구들은 이제 돈 이야기를 한다.

“요새 아파트 가격 진짜 많이 떨어졌어. 3억 초반이면 OO동 32평 아파트 살 수 있대.”라거나

“카카오 어떻게 됐어? 노답이야, 진짜.”라며 서로가 알고 있는 혹은 들은 소식들을 공유한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재테크에 문외한이라는 태도는 자신의 노후를 대비하지 않는 무책임한 태도이다. 혼자 사는 동지들과 돈 이야기를 자주 나눌 수 있기를, 사는 동안 많이 벌고 건강한 모습으로 실버타운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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