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의 기로에 선 순간,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 대신 죽지 않는다. 고속도로 나들목을 빠져나오던 엄마는 차의 속도를 미처 줄이지 못해 급커브 구간에서 가드레일을 정신없이 들이받았다. 그녀는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자동차의 핸들을 오른쪽으로 끝까지 돌렸다. 덕분에 엄마는 약간의 찰과상도 없이 운전석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지만 조수석은 형편없이 찌그러졌고 내 발등의 뼈는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다. 자동차를 폐차시켜야 했던 이 사고로 세상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죽어줄 만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비록 엄마일지라도 말이다. 운전에 트라우마가 생긴 것은 그때부터였다. 한참이 지나 재미 삼아 타본 ATV를 몰다가 갑작스러운 공포에 핸들을 꺾어 고추 밭에 처박혀 울었을 때, 내 남은 인생에 운전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인생 아니던가. 그로부터 6년이 지나 이직을 했을 때, 왕복 두 시간의 출퇴근 시간은 운전을 해야만 하는 가장 완벽한 이유가 되었다. 나는 며칠 만에 피로에 절었고 가로수를 들이받아 울면서 출근하는 한이 있어도 아침의 30분을 더 자고 싶어졌다. 기특한 게으름과 망각은 운전의 공포를 이겼다. 때마침 아빠는 출근이 힘들다고 툴툴대는 딸을 보다 못해 단골 자동차 정비소에서 20년이 훌쩍 넘은 금색 중고차를 사 왔다. ‘금색이라니!’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발령 대기 기간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여행을 다녀오느라 남은 건 빚뿐인 나에게 더 나은 선택지는 없었다. 번쩍이는 첫차에 ‘금동이’란 애칭을 붙여주고 아버지께 운전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서웠다. 무서워 죽겠는데 고속도로로 나가자는 아빠에게 짜증이 났고 잔뜩 예민해져서 결국 갓길에 차를 세우고 아빠와 싸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가장 편한 길로 출퇴근 코스를 짜주고 일주일이 넘게 출퇴근길을 동행해 주었다. 아직도 여기저기 쿡 처박긴 하지만 아빠 덕에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필요에 의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운전을 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이었지만 운전을 하게 되니 많은 것들이 편리해졌다. 무엇보다도 시간을 절약하고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운전의 이로움이 가장 컸다. 누군가는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차량 유지비를 지불하고 매일 아침과 저녁의 30분씩을 산다. 덤으로 대중교통 속의 사람들에게 치여 소모되는 에너지도 지키면서.
힐링이 필요하다는 친구의 집 앞으로 가서 그녀를 태우고 계곡이 있는 산속의 카페를 가거나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지는 마음을 애써 누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기쁘다. 지금 당장 익숙해서 답답한 이 도시를 떠나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꼭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마음에 작은 창을 내어 준다.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은 다르니까.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떠나는 여행도 재미있지만 ‘두꺼운 외투를 가져가면 가방의 부피가 너무 커지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치우고 제 몸만 한 보따리를 뒷좌석에 던져놓고 가볍게 돌아다닐 수 있는 여행은 가뿐해서 더욱 좋다. 하다못해 마트를 가더라도 계란을 살까 말까, 콜라와 사이다 묶음을 살까 말까 망설이지 않고 ‘트렁크에 때려 넣으면 되지 뭐.’ 하고 쇼핑카트에 생각 없이 담을 수 있다는 점이 편리하다. 이러한 일상의 사소한 편리함이 모여 전체적인 삶의 질을 올린다.
나는 이 편의성에 지배당했다. 그래서 요즘에는 운전이 재미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몇 달 전 혼자 여행을 갔을 때는 차를 빌려서 제주도의 신창 풍차 해안도로를 달렸다. 파란 하늘과 느긋이 돌아가는 거대하고 하얀 날개를 보며 다음엔 꼭 노을이 질 때 이곳에 다시 올 것이라고 다짐했다. 차가 별로 없는 시골 도로를 운전하면서 유튜브에서 ‘드라이브할 때 듣는 노래’ 따위를 찾아 틀고 목청껏 따라 부르기도 하고 또 어느 밤, 가슴에 뿌연 안개가 내려앉으면 시원하게 트인 신천대로를 떠올리기도 하니 어느새 운전이 꽤 익숙해진 것 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고속도로에서 핸들을 꼭 쥔 채로 덜덜 떨고 있는 나에게
“취직도 시켰고, 운전도 가르쳤으니 이제 내가 해줄 건 다 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생업이 있고 운전을 할 수 있으면 혼자 사는데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어릴 때는 “너를 곱게 키워서 시집을 보내는 게 아빠의 의무다.”라고 하셔서 나의 결혼이 아빠의 마지막 의무라고 생각하실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나를 온전히 자립시키는 것이 아버지의 목표였나 보다. 내 두 발로 어디든 쉬이 갈 수 있게 만들어준 아빠가 고맙다. 멀리 발령을 내준 인사담당자가 야속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덕에 운전을 하게 되었으니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다는 옛말이 와닿는다. 돈벌이와 운전, 아직 어느 하나 초보의 모습을 벗지 못했지만 나는 대견하게도 혼자 달린다. 조수석에서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봐주던 아빠의 도움 없이 스스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