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에게 까였다. 소개팅을 했고 2번째 만남 뒤 ‘좋은 사람인 것 같지만 깊은 사이로 발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명료한 말로 깔끔하게 거절당했다. 톡을 주고받을 때마다 늦어지는 답장에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늘 거절을 하던 입장에서 당하는 입장이 되어보니 깨나 충격적이었다. ‘내가 못생겼나?, 이제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은가?’ 자존감이 상처가 난 자리에 과대망상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르는 데 친구의 창찬이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하며 톡을 보냈다.
“나 못생겼어?” 사연을 들은 그녀가 대답했다.
“까일 얼굴은 아님.” 친구야, 이것도 위로라고 하는 거니?
자존감, 자신감, 자기애. 여전히 이러한 개념들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만 어쨌든 나에겐 그런 것들이 바닥을 치던 시절이 길었다. 아빠는 뚱뚱한 여자들을 혐오했다. 티브이에 살집이 있는 여자가 나오면 자기 관리를 하지 않는다고 일갈했으나 화면 속의 몸과 자신의 몸이 별반 다르지 않았으므로 결국 제 얼굴에 침 뱉기였다. 아빠의 말이 나쁘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여자는 살이 찌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몸집에 비해 유독 뚱뚱한 엉덩이를 갖고 태어났다. 그가 딸의 빵빵한 엉덩이를 귀여워하며 ‘빵디’라고 부를 때마다 뚱뚱한 여자를 깔보던 아빠의 표정이 떠올라 자꾸만 나의 못난 몸이 미워졌다.
아빠는 일면식도 없는 여자의 몸을 평가하는 데서 그쳤지만 엄마는 노골적으로 나의 몸을 평가했다. 등을 밀어주러 욕실에 들어와서는 ‘어휴 떡대 봐라.’ 거나 ‘살 좀 빠졌네?’라며 묻지도 않은 몇 킬로그램의 변화를 귀신처럼 잡아 내었다. 엄마가 등을 힘차게 밀수록 내 넓은 어깨는 점점 더 동그랗게 말렸다. 그중에서도 바지를 사는 일이 제일 고역이었다. 허리에 사이즈를 맞추면 엉덩이가 터질 것 같았고 엉덩이에 맞추면 허리에 주먹 두 개가 들어가고도 남는 희한한 체형을 가진 바람으로 내 몸에 꼭 맞는 바지를 사는 일이 쉽지 않았다. 점원이 사이즈를 추천해 줄 때마다
“어휴, 맞겠나? 쟤가 상체만 저렇지 엉덩이가 커서요.”라며 딸의 몸을 창피해하듯이 말하는 엄마가 야속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4킬로 정도가 쪘을 때는 먹던 밥그릇을 빼앗겼다. 덕분에 음식에 대한 강박이 생겨서 인적이 드문 아파트 공터에서 과자를 잔뜩 먹고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4킬로가 찌고 먹토를 했던 그때도 여전히 나는 정상체중의 범위에 속했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과체중이었던 때가 없었으나 늘 가진 몸에 만족하며 살지 못했다. 엄마는 내게 외모 콤플렉스를 만들어줬고 그러모은 자존감을 좀먹었다.
그런데 나를 보고 예쁘다고 끊임없이 말해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소호는 나의 큰 엉덩이를 보고 섹시하다고 말했고 모텔 천장에 달린 거울을 보며 몸매가 예쁘다며 감탄했다. 소호뿐 아니라 나의 전 연인들은 예외 없이 나의 큰 엉덩이를 좋아했다. 덕분에 나도 나의 ‘빵디’를 자랑으로 여기게 되었다. 나와 아침을 맞았던 남자 중 하나는 부스스한 민낯을 보고도
“여름씨 남편이 될 사람은 좋겠어요, 이렇게 예쁜 얼굴을 매일 볼 수 있잖아요.”라고 말했다. 뭐 그런
느끼하고 달콤한 말들이 나의 무너진 자존감을 쌓아 주었다. 나의 외모를 스스로 좋아하게 되자 이제까지 엄마가 나에게 했던 말들이 모두의 시선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몸은 언제나 나에게 완벽했지만 엄마와 소호가 본 나의 몸은 달랐다.
엄마의 말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이제껏 자존감을 도둑질했던 그녀에게 화가 났다. 어느 날은 식탁에 앉아 진지하게 말을 했다. “엄마가 하는 말들이 내 자존감을 갉아먹어.” 엄마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놀랐고 나는 그것을 모를 수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하지만 30년이 훌쩍 넘도록 딸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는 당연하게도 내가 어렵게 꺼낸 말을 자주 까먹고 습관처럼 옷가게의 점원에게 나의 엉덩이가 뚱뚱하다 말했다. 하지만 나는 예전처럼 참지 않았다. 엄마가 무례한 말을 하면 세모눈을 뜨고 그녀에게 화를 냈다.
“엄마 그렇게 말하면 기분이 좋아? 사람들 앞에서 나를 무안 주면 기분이 좀 나아져?” 그녀는 놀랐지만 한동안은 말을 조심했으니 스스로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날을 세웠다. 편한 딸로 살아가는 것보다 어려운 딸이 되는 편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었다.
엄마의 말에 반박하며 ‘나는 절세미인이다.’라고 스스로 세뇌시키고 있지만 이미 생긴 몸매에 대한 강박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뱃살이 나왔다 싶으면 저녁을 먹지 않고 여전히 식사 때마다 한 숟가락의 밥을 남긴다. 통통한 사람을 보고 ‘살 좀 찌면 뭐 어때, 귀엽기만 하고만.’이라고 하면서도 스스로가 통통 해지는 일은 결코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남을 대하듯 자신에게 너그러워진다면 좋을 텐데, 아직은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지나친 찬사를 보낸다. 모자라면 친구에게도 칭찬을 해달라고 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나 남자한테 까였어. 자존감 박살 났으니까 하루에 칭찬 한 개만 해줘.” 며칠 동안 졸라 받은 칭찬을 주워 먹고 마음을 다시 세웠다.
살다 보면 애써 쌓아 왔던 자존감이 부서지는 순간이 있다. 혼자서 감정회복이 힘들다면 친구나 애인의 도움을 받는다. 자존감 도둑과 거리를 두고 자존감 지킴이들의 달콤한 말들 속에서 회복할 힘을 얻는 것이다. 그들의 따뜻함이 뿌리가 되어 언젠가는 자기 위로 만으로도 무너진 마음을 회복할 수 있겠지. 번번이 실패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휩쓸리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엉덩이가 크고 까만 피부를 가진 곱슬머리 여자가 세상 가장 매력적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