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도 잘하고 유사시에는 모르는 사람과 멱살 잡기도 마다하지 않는 아빠로부터 어떻게 우리같이 유순한 남매가 태어났는지 놀랍도록 신기할 따름이다. 어려서부터 친구의 짓궂은 장난에 맞서기보다는 눈물이 앞서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고 친구와 다툰 적도 손에 꼽는다. 싸울 만큼 화나는 일이 생기면 이해하거나 손절하는 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거나 ‘좋은 게 좋은 거다 ‘ 따위의 말을 믿는 부류였기 때문에 일을 할 때에도 상대에게 친절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동료들의 협조가 비교적 쉽게 이루어지는 편이었다. 민원인의 곤란한 요구 사항도 상냥한 말투로 공감하면 어느 정도는 내 선에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일이 많았다. 한동안은 친절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데 독립을 준비하면서 나의 믿음이 삐그덕 대기 시직했다.
“집 살 돈은 있어요?” 부동산 매물을 보고 공인중개사에게 전화를 걸어 집을 보고 싶다고 요청을 했을 때 중개인은 자못 의심하는 말투로 물었다. ‘돈이 있으니까 집을 보자고 하겠지요. 돈도 없는데 왜 시간 아깝게 남의 집을 보러 다니겠어요?’라고 따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채 대답을 했다.
“저 돈 있어요…” 중개인은 집주인에게 전화해 보고 알려주겠다고 말하고선 2주 내내 연락이 없었다. 엄마에게 부동산 아저씨가 계속 연락이 없다고 말하자 그녀가 다시 전화를 했다. 바로 다음날 우리는 집을 보기로 했다. 하루면 해결될 일을 어째서 이주나 기다리게 했을까? 돈을 낼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난데!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계약을 하러 간 자리에서 공인중개사 아저씨를 계속 흘겨보았다. 내 최대한의 복수였다. 다소 불편한 상황들이 았었지만 남편이 있는 늙은 여자가 힘써준 덕분으로 이사를 하게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사를 한 지 4개월쯤 천장의 벽지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도배업자에게 다시 작업해줄 것을 요청하자 딸이 결혼 준비를 하고 있어 바쁘다며 그냥 살면 안 되겠냐고 했다. 나는 절대 안 된다며 꼭 다시 와달라고 했지만 그는 7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시 도배를 해주지 않고 있다. 나도 이제는 포기하고 옷방 천장을 볼 때는 대충 흐린 눈을 하고 지나간다.
여자 혼자 살면 무시당한다는 어른들에 말에 콧방귀를 뀌면서 '나는 혼자서 전등도 갈 수 있고 드릴도 쓰고 가구도 조립하는데 무시당할게 뭐가 있겠어요, 어지간한 남자보다 제가 나아요.’라고 했는데 혼자 살아보니 체감하기 싫은 그 말을 몸소 느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가끔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여자를 무시했다.
혼자 살아서 위험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밤늦은 거리를 걸어갈 때 누가 따라오거나 버스에서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으니까 알아서 신변을 조심했다. 택배를 아버지 이름으로 시키기도 하고 어두운 길을 지나갈 땐 귀를 쫑긋 세우고 인기척을 느끼며 다녔다. 하지만 일상에서 이런 식으로 무시당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생소했다. 앞으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얼마나 더 많이 닥쳐 올까?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순간이 점점 더 많아지겠지. 나의 집에는 나 대신 나서 싸워줄 아빠도, 닦달해 줄 엄마도 없으니 평화주의자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던지고 가끔은 시장터의 쌈닭이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웃으며 상냥하게 대하니 호구 취급을 한다.
나쁜 사람들, 미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