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에는 없는 해변을 찾아서
하노이 주변엔 이렇다 할만한 해변이 없다. 근처에 바다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롱베이의 바다는 푸르른 해변이라기보다는 초록빛의 깊은 바다라 시원한 느낌을 받을 수는 없다. 연말이 다가오면 아무리 중남부 해변이라도 물에 들어가 놀만큼 따뜻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부지런히 비행기표를 끊어 호이안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 호이안에 도착하는 일정이라 새벽같이 하노이에서 출발하였다. 새벽 다섯시의 하노이는 처음이었는데, 한동안 구경도 못하던 비가 하필이면 오늘따라 푸슬푸슬 내렸다. '만원 주고 산 비싼 싸구려 우비를 가지고 나왔어야 하나 20번은 입어야 본전인데...' 하는 생각을 하며 우버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 우버 예약을 해두면 새벽에 따로 나가 택시 잡거나 하지 않아도 정해진 시각에 우버 기사가 도착하여 공항에 갈 수 있다. 그러나 호이안은 우버 이용이 불가하고, 그랩은 가능은 하나 그냥 근처 음식점이나 카페, 호텔, 테일러샵 등에 택시 하나 잡아달라고 하는 것이 더 편하다.
특히 고됐던 한 주간의 피로를 눈두덩이에 가득 담아 비행기에 탔는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말소리, 울음소리와 그런 아이를 다그치는 여자의 비명소리에 가까운 잔소리에 편히 잠을 청하지 못했다.
다낭 공항에 내리자마자 택시를 알아보았다. 다낭 공항에서 호이안까지는 요금은 400.000동으로 담합이 되어있다. 이만원이라는 이야기인데, 하노이 공항에서 시내까지 보통 이만원이 안 나오는 걸 고려하면 물가가 상당히 비싸다는 걸 알 수 있다. 운이 좋게도 같은 시각 호이안까지 가는 택시비를 묻는 브라질 커플을 발견하여 같이 가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였고 그들 역시 거절할 이유가 없어 함께 택시를 타고 시내로 갔다. 그들은 25일간의 동남아 여행 중 나흘을 호이안에서 보내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하였다.
택시를 타고 오는 길에 창밖으로 본 호이안에 대한 첫인상은 '이 정도면 나도 운전할 수 있겠다'였다. 하노이에 비하면 훨씬 한적해서 나같은 사람도 한번쯤 오토바이 운전을 꿈궈볼 수 있을 것 같은 정도다. 그러나 나의 일정에는 오토바이 렌트가 적합하지 않았고, 늘 그렇듯 택시를 대중교통 이용하듯 타고 다녔다. 혹은 뚜벅이로
택시에서 내리면서 택시비 만원을 아낀 것에 뿌듯해한 것도 잠시. 예약한 호텔이라고 생각하고 내린 곳은 나의 호텔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나를 내려준 택시는 그들의 목적지를 향해 출발해버린 뒤였고, 예상치 못한 일이라 약간 당황하였다. 사실 당시 당황할 기운도 별로 없어서 꽤나 침착하게 내가 간 집(?홈스테이 같은 느낌의 숙소였으나 겉에서 보기에는 그냥 집 같았다)의 직원에게 나의 호텔 위치를 물었다. 다행히 나의 숙소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걸어가려던 참에 그 곳에 머무는 한 한국인이 마침 집을 나서려던 참이었나보다. 친절히도 한 블럭만 가면 되는 곳인데도 나를 오토바이로 태워다 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래저래 사람 덕을 많이 보는 날이라고 생각하며 큰 문제 없이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체크인을 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일찍 도착한 바람에 두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맞은편 호텔에서 알려준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전날 세시간 정도밖에 못 잔 탓에, 카페에서 기다리는 두시간 동안 소파에 흡수된 듯이 녹아있었다. 손님은 내가 유일했고, '그냥 좀 편하게 기대던 자세'는 거의 '집 거실 소파에 누워있는 자세'로 바뀌어갔다.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고 체크인을 하고 들어간 숙소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혼자 쓰기엔 충분히 넓은 침대에, 지어진 지 얼마 안된 듯한 깔끔함이 맘에 들었다. 게다가 직원분들이 너무 친절해서 좋았다! 밤에 작은 도마뱀을 보고 놀라긴 했지만, 도마뱀은 바퀴벌레에 비하면 깜찍하다고 생각해서 한편으로는 움직이는 작은 생물체가 벌레가 아님에 안심하기도 했다.
짐을 풀고 발걸음을 옮긴 곳은 테일러샵이었다. 전에 산 롱 드레스가 발에 밟힐 정도로 길어서 잘라야만 했는데, 하노이에서는 기회가 안돼서 맡기지 못했었다. 이 곳에 오기 전 호이안이 맞춤옷, 맞춤화로 유명하단 것을 알게되었고, 잊지 않고 수선을 맡길 옷을 챙겨왔다.
간신히 숫자 정도 말하는 실력으로 베트남어로 흥정하여 우리돈 2500원 정도에 기장을 줄일 수 있었다. 아오자이를 맞출까도 싶었는데, 아직 머릿속으로 그리는 나만의 아오자이가 명료하지 않아 다음으로 미뤘다. 아마도 예정대로 하노이에서 맡길 듯 싶다.
아오자이를 맡기는 지역마다 약간은 다른 스타일이 나온다고 한다. 활동량에 따라 아오자이의 소매나 모양이 조금씩 달라진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
아무튼 수선은 아주 맘에 들게 되었다. 발꿈치에 딱 맞게 잘라달라고 하였는데, 기가 막히게 잘 해준 덕에 여행 내내 잘 입고 다녔다. 그렇다고 아주 똑-바르게 박음질을 해준 것은 아닌데, 어차피 구조적으로 잘 보이지 않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옷를 맡기고 느즈막히 식사를 하러 근처 찜해둔 음식점을 찾아갔다. 트립어드바이저에서 보고 갔는데, 이 곳은 완전히 여행자(90% 이상이 서양인)를 위한 음식점이었다.
이 곳을 찾으려면 일본 다리를 건너서 골목 안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음식점을 찾으러 간다는 말에도 직원(?)들은 입장료를 요구했다. 입장료라는 것이 웃긴 게, 곧장 가까운 길로 들어가고 싶으면 돈을 내고 돈을 내기 싫으면 돌아가라는 개념이다. '입장료 없이 니가 가고 싶어하는 음식점에 가려면 알아서 돌아서 가라'는 그들의 말에 망설입 없이 등을 돌려 더 걷는 것을 택했다. 그 이후로도 여기저기서 표를 요구했고 그때마다 나는 돌아가는 방법을 택하여 티켓을 끝내 구입하지 않았음에도 구시가지를 구석구석 다 볼 수 있었다.
식사는 기대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음식보다는 분위기나 인테리어가 좋았다. 주로 서양인들이 와서 식사를 하는 곳이었고, 햄버거를 시키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처음 나온 작은 번 속에 돼지고기를 넣은 요리가 맛있어서 본 식사도 기대했는데, 식사 메뉴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대체 왜 치킨 아래에 밥이 있는지 이해가 안될 정도로 닭과 밥이 따로 놀았다. 닭고기 자체는 매우 부드럽고 불맛도 좋았지만 음식의 전체적인 조화가 별로였다.
하노이 음식과 크게 달랐던 건 민트였다. 이 곳에서 먹은 민트는 하노이에서 먹은 것보다 훨씬 단 맛이 좋았다. 애플민트인 듯 했다. 민트가 독하지 않으니 음식과 더 잘 어울렸다. 한국에 돌아가면 국수나 밥에 민트가 올라간 어처구니 없는 맛을 그리워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밥을 먹은 뒤 택시를 타고 안방해변으로 갔다. 올드쿼터에서 해변까지는 70.000동 남짓이 든다. 테일러샵에 부탁해 잡아달라고 하였고, 그랩에서 본 것보다 오히려 저렴한 가격이었다.
해변은 황홀하게 아름답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시끌벅적하지 않은 한적함이 맘에 들었다. 기나긴 해안선을 따라 사진 같은 선베드가 줄지어 배치되어 있었다. 나도 맘에 드는 곳을 골라 사이공비어 하나를 시켜 자리를 잡았다. 햇볕도 심하게 나지 않고 그렇다고 우중충하지도 않아 해변에 누워있기에는 정말이지 최적의 날씨였다. 서너시간을 그렇게 누워있다가 바다에 들어갔다가 하며 노닥거렸다.
샤워 시설은 생각만큼 나쁘진 않았다. 샤워실을 사용할 때마다 250원씩 내야하는데, 알고보니 샤워 말고 화장실을 사용할때에도 내야했다. 뜬금없는 유럽식 화장실 요금 지불 문화를 여기서 만나다니 좀 황당하긴 했다.
우연히 옆 자리에 앉은 터키 아저씨와 말을 트게 되었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터키아저씨는 가장 그리운 것이 음식이라고 했다. 베트남음식에 쓰이는 소스가 가진 묘한 냄새 때문에 식사하기가 매우 까다롭다고 하였다. 젓갈이나 마늘 같은 것에 친숙해서인지 향이 강한 야채를 제외하고는 베트남 음식에서 거부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듣고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나온 김에 저녁을 같이 베트남식으로 먹기로 하였다. 저녁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유명하다는 포슈아에서 먹었다. 한국인들이 얼마나 많이 방문하는 집인지, 곳곳에 한국어 안내가 써있었다.
쌀국수가 유명하다는데 정작 쌀국수는 먹지 않았다.
분짜, 튀긴 스프링롤, 화이트 로즈(?), 완탕 어쩌구를 먹었다. 맛은 아주 평범했다. 하노이 음식에 길들여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국물도 시큼하고 다소 부실한 고기가 들어간 분짜가 특히 그냥 그랬다. 관광지 주변의 음식점은 이럴 수 밖에 없다보다 싶어서 두끼니만에 호이안 음식에 대한 기대는 접어두었다.
밤의 호이안은 사람들의 이야기만큼 아름다웠다. 형형색색의 전등이 호이암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밤에 바보가 되어버리는 아이폰 카메라는 눈으로 담는 것만큼 사진을 찍어내지 못했다. 위의 사진은 그나마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저녁에 찍은 사진이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에 들어오니 정말 피곤이 온 몸을 휘감았다. 그럼에도 아주 늦은 시각에야 잠들 수 있었고, 그 다음날 아침도 시끄러워서인지 환경이 낯설어서인지, 생체 출근 시계 때문인지 여덟시에 눈이 떠져 충분히 자지 못하였다.
하노이까지 통틀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카페 호이안 로스터리와, 맞춤화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