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맛, 누룽지죽
나는 압력밥솥 예찬론자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이따금씩 압력밥솥으로 밥을 지어주셨는데, 압력밥솥에 지은 밥은 그야말로 꿀맛이요, 맛의 신세계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반찬에는 공을 들이시면서도 밥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셨고, 대체로 밥은 늘 전기보온밥솥으로 하셨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나에게는 흔한 전기보온밥솥이 6·25를 겪으며 시골에서 어렵게 자라신 어머니께는 신문물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손으로 빨면 더 개운하고, 말끔한 줄 알면서도 당연하게 빨래는 모두 세탁기에 맡기는 나의 경우처럼 어머니에게 전기보온밥솥이란 주부의 수고를 가뿐하게 덜어주는 아주 똑똑한 도우미와 같지 않았을까.
나에게는 낡은 압력밥솥이 하나 있다. 대학 졸업하고 자취를 시작할 때 어머니께서 처음 사주신 주방 살림이다. 지금은 세월이 너무 흘러서 손잡이도 덜거덕거리고, 이따금씩 압력이 되지 않아 ‘피-’ 하고 김이 새면, 밥물이 넘치지 않게 달려가 손잡이를 꾹 누르고 있어야 비로소 추가 돌아간다.
결혼할 때, 어머니는 나에게 최신형 전기압력보온밥솥을 사주셨다. 전기압력보온밥솥에 지은 밥은 가스레인지 위에 바로 올려서 가열하는 일반 압력밥솥과 밥맛이 거의 비슷했다. 그때는 두 아이를 연년생으로 낳아 키우던 때라 때마다 밥을 새로 해서 먹는 일이 무척 힘들었다. 밥을 한 번 하면, 어느 때는 이틀 또 어느 때는 사나흘도 먹었다.
“밥만 맛있으면, 별다른 반찬 없이도 맛있게 먹을 수 있어.”
어린 아기들을 혼자 키우느라 애쓰는 줄 알았기에, 집안 살림이나 식사 등에 불평을 하지 않았던 그 시절 남편이 언젠가 내게 한 말이다. 그 무렵부터 나는 반찬 가짓수는 줄이더라도 밥만큼은 끼니마다 새로 지어주자 마음먹었다. 전기압력보온밥솥은 밥을 지을 때만 사용하고 코드를 뽑았고, 혹시라도 양 조절을 잘못해서 찬밥이 남으면 잘 싸두었다가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전기압력보온밥솥은 고장 났고, 나는 그 압력밥솥을 고치지 않고 그냥 처분하였다. 마침 그 무렵 어디선가 보온밥솥이 전기세를 어마어마하게 잡아먹는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더욱 미련이 남지 않았다. 밥 짓기가 조금 수고로워진 것도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단 하나, ‘추억’과 ‘마음’을 처분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조금 아쉽기는 했다. 그 압력보온밥솥이 결혼하면서 친정어머니께 받은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닭백숙이나 갈비찜을 해 먹을 때 사용하던 압력밥솥을 꺼내 끼니마다 밥을 지어먹고 있다. 되도록 밥을 남기지 않으려고 밥 한 공기를 만들기 위해 어느 정도의 쌀이 필요한지, 햅쌀과 묵은 쌀로 밥을 지을 때 어느 정도 물을 부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 세기의 불로 얼마나 가열해야 누룽지가 생기지 않는지 유심히 살폈다. 마침내 시계를 전혀 보지 않고도, 추가 어느 정도 돌아야 누룽지가 생기지 않는지 감을 잡았고, 몇 번을 반복해도 실패하지 않는 자신을 보면서 묘한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나는 일부러 시간을 더 늦추어 누룽지를 만들고 있다. 누룽지를 특별히 좋아하게 됐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솥 바닥에 누룽지가 생긴 흰밥이 훨씬 더 고소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룽지를 전혀 만들지 않는 것이 밥을 잘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것을 깨닫는 데 10년이 걸렸다. 맛있는 밥에 대한 생각은 시시때때로 변한다.
밥이 혹시 타지 않을까 조바심 내면서도 불을 세심히 조절하고, 밥의 향기와 추의 소리를 세심히 살피는 여유가 생겼다. 또다시 귓가에 들리는 그 시절 남편의 목소리.
“밥만 맛있으면, 별다른 반찬 없이도 맛있게 먹을 수 있어.”
그렇다, 동의한다.
아버님 산소 가는 날, 시댁 식구들 먹을 것까지 김 밥을 싸다보니 평소보다 누룽지가 조금 더 두껍게 나왔다. 그래서 그날 저녁, 물을 붓고, 팔팔 끓여 누룽지죽을 만들었다. 남편은 밥과 국을 좋아하지만 꾀가 나서 밥과 국을 누룽지죽으로 대신한 것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을 싸고, 산을 타고 했더니 녹초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누룽지죽으로 정식 끼니를 만든 것은 아마도 결혼하고 처음이지 싶다. 싫은 얼굴을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남편과 아이들이 반겼다.
볼락은 마트에서 가시를 발라내고 살만 파는 것을 구입했다. 냉동 생선이라 처음에는 딱히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시식을 해보니 담백하고 맛이 괜찮았다. 냉동 볼락은 한 번 가볍게 헹군 뒤, 기름을 넉넉히 두른 팬에 잘 지져서 앞뒤로 소금을 뿌렸다. 그런 다음 상을 차리고 마지막에 토치로 겉을 좀 그을려주었다. 은은한 불 냄새가 생선에 배어 식욕을 자극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생선 중 하나인 옥돔처럼 담백하고 깔끔하면서도 감칠맛이 있었다. 다음에는 일반 기름과 함께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발라서 구워볼까 생각했다. 그러면 왠지 더 고소할 것 같다.
오늘은 좀 쉽게 쉽게 가자는 생각에 참치캔을 하나 따서 김치와 볶았다. 양념을 많이 넣지 않아서 시원하고 깔끔한 충청도식 김치가 다 떨어져서, 나 먹으려고 담근 양념을 많이 넣은 김치를 냈더니 역시나 남편이 잘 먹지 않았다. 그래서 참치와 함께 볶은 건데, 이렇게 해주니 잘 먹었다. 진간장도 조금 넣고, 맛술도 조금 넣고, 실파와 양파도 넣어서 달달 볶았다.
남편이 좋아하는 감자채볶음은 햇감자로 만들었다. 기름에 마늘을 볶다가 찬물에 헹궈 전분기를 제거한 감자와 송송 썬 청양고추를 넣고 볶은 뒤 소금으로 간해주면 언제 먹어도 맛있고, 일정한 맛을 내는 감자채볶음이 완성된다. 오이도 하나 잘라서 경상도식 쌈장과 내고, 멸치볶음도 냈다.
투박하고 소박한 우리 집 밥상. 아주 맛있거나 특별할 것은 없지만 이렇게 먹으니 그냥 편했다.
<오늘의 식단>
- 구수한 누룽지죽
- 기름에 한 번 지지고, 토치로 한 번 그을려 준 볼락구이
- 남편이 좋아하는 감자채볶음과 참치볶음
- 멸치볶음과 오이 그리고 경상도식 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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