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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 겨울 Apr 12. 2019

투박하지만 정겨운

추억의 맛, 밥국

 어렸을 때 자주 먹었던 편한 밥, 김치 국밥. 우리 집에서는 이 음식을 ‘밥국’이라고 불렀다. 밥국은 날씨가 선선할 무렵부터 추울 때까지 찬거리가 마땅치 않을 때 어머니가 뚝딱 만들어내시던 음식이다. 시원하고 칼칼한 이 밥국을 식구가 다 참 좋아했다. 찬밥 한 덩이와 묵은지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쉽게 만들 수 있는 데다, 맛있기까지 하니 어머니에겐 일당백 메뉴였음이 자명하다. 그때 우리 집엔 식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밥국을 끓이는 날이면 꼭 둥그런 상을 펴고, 온 식구가 머리를 맞대고 먹었다. 복닥복닥했지만 참 행복했던 유년 시절의 추억 한 조각이다.

 30년 가까이 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식문화가 엄청나게 발전하고 달라졌다. 요즘엔 맛있는 음식, 새로운 음식이 너무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에 먹었던 투박하고 거친 음식을 다시금 찾아 복기하는 이유는 음식에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밥국을 신혼 때 남편에게 끓여준 적이 있다. 그런데 밥국을 처음 본 남편은 꿀꿀이죽이냐며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단 한술도 뜨지 않고 라면을 끓여 먹겠다고 말했다. 나는 순간 매우 당황했다. 고향에서 흔히 먹는 가정식이었기에 남편에게도 완전히 생소한 음식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다. 마음이 퍽 상한 나는 먹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며 남편에게 다시 권했다. 무조건 남편의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남편은 몇 숟가락 떠먹더니 그래도 아니라고 말했다. 이제는 남편이 새로운 것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란 걸 알기에 이런 행동도 다 이해하지만, 그 당시에는 잘 몰랐기에 서운함만 들었던 것 같다. 그 이후, 밥국은 우리 집 식탁에서 사라졌다. 아이들도 어렸고, 남편도 좋아하지 않으니 만들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얼마 전 갑자기 이 밥국이 너무 먹고 싶었다. 정말 뜬금없이 그랬다. 식구들 먹을 반찬과 국을 끓이고, 내가 먹을 밥국을 따로 만들까 하다가 시간도 별로 없고, 찬거리도 마땅치 않아서 밥국으로 한 끼를 꾸리자고 결심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떡국떡과 칼국수 반죽이 조금 있었다. 그리고 김치냉장고에는 살얼음이 낀 데친 콩나물이 있었고, 온도 조절을 잘못해서 얼어버린 친정어머니의 김치가 있었다. 얼어버린 김치를 처리하는 데는 푹 끓여먹는 밥국만 한 게 또 없다. 이 정도면 밥국도 보통 밥국이 아닌 제법 거창한 밥국을 끓일 수 있겠다 싶었다.


 냄비에 데친 콩나물 맛국물(콩나물 선도가 떨어져서 콩나물을 데친 뒤 국물과 콩나물을 분리해서 보관했다)을 붓고, 다시마와 멸치를 넣어서 맛국물을 만들었다. 나는 냉장고에 있던 식재료를 최대한 활용하느라고 이렇게 한 것인데, 보통은 그냥 생콩나물을 사용한다. 밥국에 콩나물이 들어가면 콩나물의 식감도 식감이지만 국물이 시원해서 좋다.

 맛국물이 완성되면 건더기를 건져내고 김치 1/4포기를 꺼내 가위로 쫑쫑 잘라 넣는다. 김치가 얼어서 김치를 잡고 있던 손이 얼얼했다. 나는 언 김치가 있어서 그것을 사용했을 뿐 보통은 그냥 김치를 사용하면 된다. 

 김치 국물과 깍두기 국물도 듬뿍 넣었다. 이때 넣은 깍두기 국물이 전체 맛을 좌우한다. 김치 국물도 물론 맛있지만, 무의 즙이 잔뜩 우러나온 깍두기 국물이야말로 김치찌개를 끓이든 청국장을 끓이든 ‘신의 한 수’로 작용하는 것 같다.

 김치를 넣은 국물이 한소끔 끓으면 제일 먼저 칼국수 반죽을 수제비 모양으로 떠서 넣고, 찬밥과 떡국떡을 넣어서 뭉근하게 끓인다. 찬밥이나 떡국 떡은 모두 익은 것이지만 칼국수 반죽은 익혀야 하기에 제일 먼저 넣었고, 반죽이 국물 위로 떠올랐을 때 바로 찬밥과 떡국떡을 넣었다.

 국물과 밥이 따로 놀지 않고 푹 퍼지면 데친 콩나물을 넣고 간을 본다. 먹어보니 생각보다 간이 약해서 멸치액젓 약간, 까나리액젓 약간, 간 새우젓 약간을 넣었다. 세 가지 젓갈의 맛이 다 달라서 나는 아주 조금씩 섞어서 넣었는데, 집에 세 가지가 다 없거나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으면 안 넣어도 된다. 대신 조선간장이나 소금 등 취향대로 간하면 된다.


경상도의 흔한 가정식, 밥국

 소담스럽게 생긴 그릇에 밥국을 듬뿍 담아 남편에게 주었다. 또 불평하면 한 소리 하려고 했는데, 남편이 별말 없이 먹었다. 남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관자놀이도 흠뻑 젖었다. 요즘 몸이 안 좋은 건지 남편은 뜨끈하고 얼큰한 국물만 먹으면 땀을 그렇게 흘린다.

 그 모습이 어쩐지 짠해서 말없이 참외를 담아 식탁에 내려놓았다. 남편은 별말 없이 밥국을 다 먹은 다음, 무언가 초점이 풀린 듯한 눈으로 조용히 참외를 집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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