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찬거리가 없어서 마트로 향합니다. 한 시간 넘게 마트를 돌아다니며 찬거리를 기획, 설계하며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습니다. 반찬을 고민하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한 일입니다.
이번 주 집에서 식사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지난 반찬은 무엇이였는지, 반찬 간의 조합은 잘 어울리는지 가족들의 컨디션은 어떠한지, 날씨의 영향도 고려해야합니다.
즉 이 활동은 상당히 고차원의 기획력과 설계가 필요한 일이며 육체적 에너지 뿐 아니라 지적 에너지도 많이 소비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짐정리를 하면 “막상 해먹을 것이 없는” 아이러니 한 상황에 빠집니다. 왜일까요..?
저는 너무 뻔해진 쇼핑리스트 즉 이미 너무 정형화된 반찬, 끼니 메뉴가 새로움을 주지 못하면서 생긴 상황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에게 새로운 재료/채소를 미션처럼 제공’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글리어스(https://uglyus.co.kr)’ 라는 채소 구독 서비스를 2주 간격으로 받아보고 있습니다.
이 서비스는 못난이 농산물을 내가 필요한 양 만큼 받아볼 수 있는데 일상적으로 필요한 농산물 뿐 아니라 제철 이거나 판로가 대중화되지 않은 제품을 제안해줍니다.
때문에 평소 마트에서는 제가 절대 고르지 않고, 심지어 있는지도 몰랐던 제품들을 경험하기에 좋습니다.
그렇게 이번 절기에는 ‘땅콩호박’과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땅콩’ 모양 처럼 생긴 호박입니다. 성인 남자 손바닥 정도의 크기에 아랫부분이 동그란 게 개인적으로는 ‘표주박’을 더 연상시킵니다.
낯선 모습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듬어야할지 고민이 됩니다. 일단 겉면을 깨끗하게 닦아 세로로 반을 갈라봅니다. 오, 생각보다 단단합니다. 체중을 실어서 조심스럽게 잘라봅니다.
노란빛을 띈 주황 속살에 마음이 따뜻해지고 아래 동그란 부분에 씨가 박혀 있는 것을 보며 ‘너 호박 맞구나’ 갑자기 친근감이 상승합니다.
낯선 첫 인상에 경계했다가 한 두 마디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스브레이킹을 한 느낌이랄까요?
그렇다면 이제는 거침이 없습니다. 전자레인지에 충분히 돌려서 호박을 살짝 익힌 후 껍질을 칼로 살살 벗기고 숟가락으로 씨를 파냅니다. 남은 속살을 볶은 양파와 우유,버터와 함께 뭉근히 끓이며 핸드블렌더로 갈아주고 치킨스톡이나 소금으로 간을 하면 끝! 호박스프 완성!
처음으로 호박스프를 식탁에 올려봅니다. 솔직히 블렌더로 덜 갈았더니 죽에 더 가까웠지만요. 새로운 메뉴가 올라온 것 만으로도 그 끼니가 특별해졌습니다. 장 본 보람이 있달까요?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새로움, 낯섦, 도전이 필요하다고 말들 하지만 이 호박스프 하나 도전하는 것도 어려워하고 있지 않을까요?
딱 손바닥 정도, 500g 크기의 새로운 식재료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주 1회 채소를 다듬는 동안 떠오른 생각을 이모저모 공유합니다.
이 시간과 생각이 제철, 식물에 가까워지고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힐링 모먼트라 믿고
여러분도 손수 채소를 다듬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