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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발협력 직업인 Jul 03. 2018

내가 만약 범선이라면

Love Ontology(러브 온톨로지, 조중걸 2015)  중 발췌

내가 만약 범선이라면 


내가 만약 범선이라면,

희고 푸른 돛을 단 크레타의 범선이라면, 

로도스의 숲에서 베어져 뗏목으로 흘러온,

향기 나는 삼나무를 쪼개 나무못으로 이어 붙인 돛배라면, 

삼나무 사이를 송진으로 메운 돛단배라면,

당신을 싸고도는 솔 향과 나무 향을 내는 꿈 같은 작은 배라면,

나무와 송진이 줄무늬를 만드는 작은 배라면,

당신만 간신히 실을 작은 배라면,

작고 또 작아서 우리 둘이 붙어 있어야 할 그런 배라면,


다정한 소곤거림으로도 갈 수 있겠네.

영원히 갈 수 있겠네.

둘만이 바다 위를 떠돌 수 있겠네. 

당신의 숨결만으로,

당신의 한숨만으로,

당신의 환호만으로,

우리 먼 바다로 나갈 수 있겠네.

우리가 같이 보았던 하얀 절벽의 그 섬,

꿈만 꾸었던 그 섬에 닻을 내릴 수도 있겠네.

거기에 머물 수도 있겠네. 


그렇지만 나는 다시 항해하겠네.

닻을 거두고 돛을 부풀리며 곧 떠나겠네.

그래야 당신이 나만의 것이니까. 

누구도 무엇도 당신을 빼앗을 수 없도록.

나무도 바위도 산호도 산호 속 물고기도 에메랄드빛의 산호여울도.

조용한 숨결로 닻을 부풀린 채로.

당신 몰래 바람 타고 대양으로 나가겠네.

내 몸만이 당신의 전부인 곳.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곳으로.

나는 조금씩 가겠네. 


근심과 고통은 해안에 내려놓고,

노역과 과거도 해안에 내려놓고,

사랑과 기쁨과 미소와 당신을 싣고,

작고 하얀 나는 먼 바다로 나가겠네.

바다는 옅어지다 하늘이 되고 말겠지. 

당신은 더 이상 누구의 것도 아니겠지.

단지 내 것 이외에.


당신 눈은 꽉 차겠네.

낮엔 새들로 밤엔 별들로,

나는 별과 당신 눈을 구별도 못하겠네.

도취되어 당신 눈을 바라보겠네.

내 눈엔 당신만이 들어서리.

따가운 적도의 빛이 나를 온통 빛나게 해서,

내가 당신을 눈부시게 한다면,

기쁨으로 내 닻을 부풀리겠네.

그 빛이 나를 황금으로 바꾼다면,

당신에게 그것을 선물할 수 있겠네.

당신이 기뻐한다면 빛이 되어도 좋고 황금이 되어도 좋네.

빛으로 당신을 어루만지고 금으로 당신 품에 머무르니까.

내 눈이 온통 부시다 해도,

당신은 그래도 내  눈을 채우리.


우리가 북쪽 끝에 가고 열기가 사라진다면,

해와 구름과 눈으로 바뀌고,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오겠네. 

눈을 안은 바람이 세게 몰아치겠지.

소중한 당신을 앗아가려고.

난 당신을 더욱 깊이 안으리. 


선창의 가장 깊은 곳에 당신을 가두리.

무엇도 당신을 가져갈 수 없도록. 

언제고 당신은 온전히 내 것.

우린 한없이 작아지겠네. 

숙인 나의 어깨 안에 당신이 있겠네. 

나를 적신 물이 내 몸을 얼게 해도,

그래도 나는 추워 떨지 않으리.

내게는 당신이 있으니까.

세상의 따스함이 거기에 있으니까.


사랑과 꿈과 당신을 싣고 가리.

가는 듯 가지 않는 듯.

비단 위를 미끄러져서,

시간은 온통 사라지게 하고,

우리의 사랑만 싣고,

나는 그렇게 바다를 헤쳐가겠네.


우리는 숨겠네. 우린 사라지리.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리.

당신과 나는 멀리 푸른빛을 내고, 

점점 희미해지며 푸른 창공 속으로 사라지리.

하늘과 별이 바다와 함께하는 그 사이로 사라지리.

청금색 별들만이 그것을 보겠네.

하늘색 바다만이 그것을 알겠네.

그러고는 그것들도 우리를 잊겠네.

많은 시간이 흘러 별과 하늘도 바뀔 때, 

우리도 우리를 잊겠네. 

우리가 살았는지도 모르겠네.

우리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네. 


[출처 p174-179, 러브 온톨로지: 사랑에 관한 차가운 탐구, 조중걸 지음, 세종서적]


이 책은 사랑은 향락도, 섹스도, 관용도, 애정도, 운명도, 우연도, 경쟁도, 배타성도, 만남도, 특별함, 성적 매력도 아니라고 선언한다. 결국 사랑은 비실증적이기에 인간은 그저 침묵할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 한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을 위한 사랑(Love for love)을 하는 것. 존재 너머에 있는 사랑을,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사랑 그 자체를 다른 것과 혼돈하지 않고 겸허히 사랑하는 것밖에는 선택지가 없어 보였다. 


다만 중간 소주제 [여성의 사랑], [남성의 사랑]에서 논지를 현상묘사적으로 이끌어가는 바람에, 저자의 지성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들었다. (ex. 선진국의 할머니는 대체로 인형같이 예쁘다, 후진국 여성들은 대체로 자식을 낳았다는 권리와 법률의 보장하에 아무렇게나 늙어간다 등의 문장)  

  

2018년 7월 2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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