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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Feb 22. 2024

눈 내리는 아침의 기도

밤새 눈 내린 아침, 골목은 조용했고 시간은 멈춰있었다. 나지막한 빌라 지붕은 회색이나 녹색이 아니라 흰색이 되어있었고, 지난주 포근하던 봄 날씨에 생긴 꽃몽우리들이 무안하게 나무들은 모두 하얀 옷을 입었다. 작년 이맘때쯤 제주도 한라산에서 봤던 눈꽃들이었다. 아침이면 컹컹 짖어대던 큰 강아지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자동차가 골목길을 힘겹게 올라오는 엔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맞은편 아파트에서 걸어 나온 두 남자만이 사실은 시간이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눈이 귀한 부산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나는 마흔이 넘은 지금도 눈만 보면 그 시절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야 그런 티를 숨기느라 힘들지만, 길 위에 사람들이 적은 아침시간에는 아직 새하얀 눈을 뽀드득 소리 내며 밟아 발자국을 만들어보고, 길 한편에 쌓인 눈덩이를 발로 차보기도 하고, 장갑을 끼고 나와 작은 눈사람을 만든다. 어른이 되었더니 거기에 몇 가지가 더 늘었다. 필름 카메라를 가지고 나와 눈 내린 풍경을 조용히 담았다. 그리고 차 유리에 쌓인 눈을 스퀴즈로 밀고 마른 수건으로 닦아냈다. 오늘은 동네 식빵 가게에 가서 갓 구워낸 우유식빵과 햄치즈 식빵을 사 왔다. 나무 가지에 쌓인 눈이 바람이 불 때마다 가루가 되어 날리는 오늘은 식빵 먹기 참 좋은 날이다 싶다.


오후가 되었더니 그쳤던 눈이 조금씩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길에서 마주친 한 아저씨는 눈에 들어오는 눈을 막아보고자 점퍼의 후드를 쓰고 쉴 새 없이 눈을 깜빡였다. 그 뒤를 따르는 아들로 보이는 작은 소년은 아빠가 피하던 그 눈을 직접 먹어보고자 고개를 들고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고 있었다. 아빠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며, 눈도 먹어보겠다고 바쁜 몸짓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그리고 다시 눈이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얼굴을 스치는 작은 눈송이들을 느꼈다. 


눈이 오는 날은 포근하다. 눈이 얼굴에 닿아 녹아도 차갑다기보다는 기분이 좋다. 그냥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바람을 따라 천천히 오르내리거나 둥실 떠있는 모습을 보니, Y언니가 생각났다. 얼마 전 뇌사판정을 받았지만, 도저히 언니를 보낼 수 없는 가족들은 언니를 아직 병실에 모시고 있다. 언니는 아마도 호흡기를 끼고 삐삐 소리가 나는 기계 옆에서 곤히 잠든 것처럼 누워있을 것이다. 한동안 언니의 상태를 이해하지도 않았고 이해할 생각도 없었다. 현실을 인정하게 될까 봐 누워있는 언니를 볼 자신이 없었고 볼 기회를 애써 만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늘, 언니는 병실이 아니라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처럼 바람에 두둥실 떠올라 언니를 생각하는 사람들 곁을 지나며, 특유의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를 생각하면 그 생각들은 작든 크든 모이고 모여서 언니가 되고, 그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언니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 


지금처럼 작은 눈이 오르락내리락 바람을 타고 이동하는 모습은 귀엽고 동시에 수다스럽다. 뭐라고 재잘재잘 대는 거 같지만 나는 그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대신 눈들의 수다에 갇혀 다른 소리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동차 소리, 사람들 소리, 문을 열고 닫는 소리, 그 모든 소리들은 눈의 수다에 묻혀 사라져 버리고 그곳엔 나와 언니만 남았다. 그리고 순간 나는 언니의 미소를 본 것 같았다. 어린아이처럼 웃고 장난치는 나를 보며 빙그레 웃음 짓는 언니를 본 것 같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눈은 소란스럽게 춤을 추듯 내 시선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헤엄쳐가고 있었다. 언니의 넋이 병실에 누워있을 것이 아니라, 눈과 바람에 실려 자유롭기를. 언니를 생각하면, 언니는 여전히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내가 잊지 않기를. 봄이 오는 길목을 스치는 눈을 보며 눈송이 하나하나에 내 기도를 조금씩 담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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