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책방에서 쇼핑하는 걸 좋아한다. 친구를 만나러 나갔는데 시간이 빈다거나, 남자친구가 염색하고 커트하는 시간을 기다린다거나, 식사 후 소화시키기 위해 어딘가를 어슬렁거릴 때 주변에 책방이 있다면 그곳을 간다. 신간도 구경하고 베스트셀러도 구경하고, 그러다 발견한 책 한두 권을 사곤 한다. 추천받은 책을 살 때도 있고 아무 페이지나 열어봤다가 맘에 들어 살 때도 있고 제목이나 표지가 맘에 들어서 사기도 한다. 15주년 기념 양장본으로 나온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물속 색깔 같은 파란 표지와 반짝이는 은색 제목, 금붕어 꼬리 같이 생긴 그림이 맘에 들어 사게 되었다. 유명한 책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보다 아름다우면서 몽환적이고 동시에 서늘하면서 냉소적이기까지 해 보이는 표지가 맘에 들었었다. 그리고 여러 달 책장을 지키고 있다가 두 개의 계절이 지나 더운 여름이 되어 드디어 내 손에 잡혔다. 더운 여름 서늘한 그 색이 맘에 들었다. 햇볕이 따뜻하게 들어오는 얕은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꼬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해 보였으니까. 그 물고기 꼬리처럼 보였던 것은 알고 보니 꽃잎이었다는 걸 책을 다 보고 나서야 알았다.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듯 누워 잠을 청하며 책을 펼쳤다. 목적을 생각했을 때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저 몇 장 심심풀이처럼 읽다 보면 스르륵 잠이 들겠지. 저 살랑이는 꼬리처럼. 하지만 읽을수록 뒤가 궁금해지고 어디서 끊어야 할지 모르겠고 잠이 오기보다는 더 말똥말똥해져 버려서 결국 늦은 시간까지 책을 내려놓지 못했다. 다음날을 위해 억지로 책을 덮고 잠을 청했지만 머릿속에는 점점 말라가는 영혜의 모습이 떠올랐고 영혜가 꿈에서 본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어리들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불을 켜고 소파에 앉아 좀 전에 읽다 만 다음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다른 책들처럼 인물들을 메모하면서 관계를 이해하며 본다거나 가슴에 들어온 문장을 메모한다거나 나중에 리뷰 쓸 걸 대비해서 중요 사건을 요약하는 것 따위는 할 수가 없었다. 문장은 브레이크 없이 빠르게 달려 나갔다. 어떤 책은 문장을 읽는 나와 방금 읽은 것을 해석하는 내가 나란히 앉아 읽게 될 때도 있다. 그럼 앞에 앉은 내가 읽은 것을 뒤에 앉은 나는 장면을 재구성하거나 암시하는 것을 상상해 보거나 이중적인 의미 따위를 찾아보곤 한다. 그러나 어떤 책은 그럴 새도 없이 텍스트를 읽는 순간 순식간에 생성되는 느낌, 예를 들어 따뜻하다, 차갑다, 무섭다, 토할 거 같다, 도망치고 싶다 같은 것들이 생성되다 이내 다른 느낌들에 밀려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이 책은 따지자면 후자에 속했다. 가끔씩 생기기도 하는 왜라는 질문은 강렬한 느낌에 휩싸여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고, 도파민 중독자인 듯 그다음 감정을 찾아 재빨리 책장을 넘겨야 했다.
읽으면서는 리뷰 쓰기 위해서라도 책을 처음부터 다시 훑어봐야겠는데라고 생각했지만, 다 읽고 나니 다시 열어보기 두려워졌다. 성인 두 명이 팔을 잡아가며 먹지 않는 고기를 입에 집어넣는 폭력적이고 괴상한 장면이나 오토바이에 질질 끌려 죽어간 개의 모습, 예술이라는 포장으로 욕망에 모든 것을 던지는 남자, 동생과 남편의 괴상망측한 현장을 비디오라는 명백한 기록을 통해 맞닥뜨린 여자, 먹기를 거부하는 여자의 몸을 붙들고 억지로 먹이려 드는 (튜브를 꽂는) 첫 번째 폭력과 똑같은 폭력이 반복되는 병원. 이 모든 것들이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을 만큼 고통스럽고 괴로워서 울렁거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가의 문장은 그 고통과 추함이 아름다워 보일 정도로 수려했다. 간결하고 미끈하고 뜨거웠다. 아마 읽는 내내 나는 작가가 원하는 데로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렸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내가 이해했던 것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 이해가 작가의 의도에 맞닿았는지 모르겠다. 닿지 않았어도 상관은 없다.
첫 번째 ‘채식주의자’ 편에서는 영혜에게 어릴 때부터 가해진 (가부장적) 폭력과 억압이 보였다. 영혜는 꿈을 계기로 고기를 거부하는 적극적 행위로 폭력과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녀의 자유로운 선택은 가족들에 의해 매우 비정상적인 것이 되었고 다시 폭력의 근거가 되었다. 두 번째 ‘몽고반점’에서 영혜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깨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할까. 자유를 갈구하는 영혜는 그래서 형부의 욕망에 이용당했고, 형부는 예술이라는 이름아래 인간성을 포기했다. 그러나 정신병원에서 그들을 잡으러 사람들이 왔을 땐 그저 무서워 도망치는 이기적이고 불쌍한 존재로 전락했다. 그는 예술가도 뭐도 아니었다. 나는 이 장면에서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어린이나 정신지체장애인을 대상으로 벌어진 성범죄 사건들이 겹쳐 보여 괴로웠다. 작가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러한 폭력을 보았다. 마지막 ‘나무 불꽃’은 남겨진 또 다른 피해자 언니의 고통과 채식주의를 넘어 직접 식물이 되고자 하는 영혜의 마지막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결박을 풀고자 노력하는 영혜는 그나마 자유로운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억압 속에서 ’배려‘라는 방패를 만들어 생존한 언니에게는 영혜만큼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는 비정상이 되어버린 영혜와 어린 자식 때문에 죽음을 포기했고 삶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정신병동에 입원한 영혜는 식물이 되고자 곡기를 끊으려 하는데, 이런 선택은 병원(현재 사회)에서는 매우 비정상적인 행위이다. 그래서 억지로 튜브를 끼우는 폭력에 노출되고 결국 피를 토하고 경련을 일으킨다.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라는 영혜의 물음은 ‘어쩌면 꿈일지 몰라.‘라는 언니의 속삭임과 만난다. 죽음으로 이 삶을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죽지 못해) 꿈이라고 생각해서라도 삶을 외면하고 싶어 하는 두 자매의 괴로운 이야기는 다양하고 끔찍한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들의 이야기다. 게다가 이 사회는 피해자들을 포용하고 이해하기는커녕 그들을 정신병자와 같은 비정상적인 범주에 가둔다. 피해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찰자의 편협한 시선과 판단으로 별로 도움 되지 않는 해결책을 들이민다. 그리고 그것은 2차 3차 폭력이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두 번 볼 자신이 없다. 끔찍한 고통을 다시 바라볼 뜨거운 용기도 차가운 심장도 그 어느 쪽도 없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고통과 피해자가 우리 사회 이곳저곳에 있을 텐데 나는 그것을 직시할 위인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을 써 내려간 작가의 힘들었을 시간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이 고통마저 아름다워 보이는 작가의 문장들에 감탄을 보낸다.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인 거다.
책을 덮으니 파란 표지에 날아갈 듯 앞으로 쭉 뻗은 꽃잎이 보였다. 펼쳐진 꽃잎이 자유롭게 날아가지 못한 수많은 영혜들 같아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양장본 표지의 파란색이 갑자기 서늘해 보여 반팔 티셔츠 밖으로 드러난 팔에 소름이 돋았다.
<100자 평>
슬프고 아름다운 게 문장인지 스토리인지 알 수 없이 작가가 이끄는 데로 깊숙이 빨려 들어간다. 그러다 이 여행이 꿈이 아니라 우리의 어두운 현실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구역질이 올라오거나 부끄러워지거나 우리와 그녀들의 자유를 기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