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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May 30. 2023

아버지 기일

맛있는 제삿밥 먹는 날

  아버지 기일이 다가왔다.  아버지는 십여 년 전 병원에서 고생하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해가 길어지면서 공기가 따뜻해지고 만물이 소생하여 푸릇푸릇한 참 좋은 날에 더 아프지 말라고 아빠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이번 기일의 원래 계획은 부산에 가서 아버지를 모셔둔 양산 공원묘지를 찾아가려고 했는데, 이런저런 바쁜 일들로 부산까지는 가지를 못했다.  그래서 여느 때처럼 엄마와 아빠 기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나이 듦에 따라 손가락과 손마디에 힘이 점점 빠지면서, 제사 음식들을 준비하는 데에 좀 부담이 있다 보니, 나는 극구 제사를 축소하거나 하지 않는 방향으로 주장하는 아빠와 조상님에게는 좀 못된 딸이다.  어쩔 수 있나, 나는 그래봐야 주방 보조 역할밖에 못하고 있고,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내 엄마가 너무 힘들어하는데.  


  그런데 이 와중에 남동생은 이 제사 음식을 너무너무 맛있어하고 좋아한다.  안동에는 헛제삿밥이라고 하는 메뉴를 주로 다루는 가계들이 있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들로 구성된 정식 같은 것이다.  옛날 선비들이 제삿날처럼 맛있는 기름진 음식들을 먹고 술도 마시고 놀고 싶은데, 그렇게 못하다 보니 가짜 제사, 즉 헛제사를 지내고 제삿밥을 먹었다는데서 유래된 메뉴라고 한다.  아니 그 옛날 시절 유생이나 선비도 아니고, 제삿밥을 왜 그리 좋아한단 말이냐.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내가 먹어본 안동의 헛제삿밥은 너무 맛이 없었다. (모든 집이 그런 것은 아닐 텐데, 이렇게 표현해서 미안합니다.  제가 갔던 곳은 제 입맛에는 너무 부족한 음식들이었습니다.)  안동의 유명한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한식집 중 한 군데였는데, 기대하고 갔었지만 엄마가 해준 신선하고 따뜻하고 적당히 기름지지만 느끼하지 않고 고소하고 재료 본연의 맛이 다 느껴지는 그런 밥과 반찬들이 아니었다.  


  제사음식을 하는 건 힘들다.  종일 기름 냄새를 맡거나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나물을 다듬거나, 끊임없이 주방기구들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거나.  그럼에도 우리가 제사를 포기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음식을 하는 것은, 엄마의 제삿밥 솜씨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그래 방금 동생 핑계를 대긴 했지만 우리는 모두 엄마의 제사음식을 좋아한다.  삼색나물 저리 가라, 최소 오색 나물 반찬 (콩나물, 시금치, 미역, 도라지, 고사리 등)을 넙데데한 비빔밥 그릇에 동글동글 예쁘게 덜어 담는다.  특히 고사리는 서울사람들이 하듯 뜨거운 물에 데치는 것이 아니라, 소금으로 뽀득뽀득 주물러 빨듯이 하여 아삭하고 쫄깃한 맛을 유지하면서도 텁텁하고 떫은맛을 없애는 방식으로 한다.  그 위에 갖지은 따끈한 밥 반주걱을 올린다.  보통의 집은 여기서 고추장을 기호에 따라 가감하여 비벼 먹는 게 끝일게다.  그러나 경상도 스타일 우리 집은 탕국 두어 숟가락을 푹 퍼서 넣어 같이 비벼야 한다.  우리 집 탕국은 대합조개로 진한 다시 국물을 내고 나박 썰기한 두부, 무, 묵을 넣고 푹 끓인다.  대합조개의 다시가 성공적으로 잘 나오면 특별히 국간장이나 소금 간을 안 해도 적당한 간에 깊은 맛이 우러나와 비빔밥과 찰떡으로 어울린다. 


  그렇게 준비한 재료들을 모아 슥슥 비벼서 먹으면, 정말 그만한 비빔밥이 전국 어디를 돌아다녀도 없을 지경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최대한 기름을 적게 두르고 고소하게 구워낸 소고기 전, 어전, 동그랑땡, 새우전들을 반찬처럼 곁들이고, 살짝 짭조름하게 구워낸 반건조 조기를 손으로 찢어 한 조각 크게 밥 숟가락 위에 얹는다.  여기다가 우리 집만의 별미가 추가되는데, 낙지, 오징어, 전복 등 갖은 싱싱한 해물을 통째로 기름을 두르고 구워내듯 익힌 다음, 간장소스의 갈색 맛있는 색깔이 해물에 잘 스며들게 조려내면 이만한 밥도둑, 술안주가 또 없다.  


  올해는 지난번 안동 여행에서 사 왔던 청포도 와인을 청주 대신 아빠에게 올려드렸다.  와인이긴 하나 한국 술이고, 맑고, 무엇보다 우리가 좋아하니 이거면 됐다 싶어 따로 잘 안 먹는 청주를 사진 않았다.  그런데 이 청포도 와인이 또 일품이었다.  적당히 드라이하고 탄닌이 강하지 않아 목 넘김이 깔끔한데, 삼키고 나서는 달큼한 청포도의 과실즙의 향이 살짝 올라온다.  희한하게 이 맛이 비빔밥이랑 너무 잘 어울려서, 비빔밥을 먹는 동안 알코올쓰레기인 내가 와인을 두 잔이나 마셔버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삼켜진다.  제사도 제사고 조상님도 조상님이고 돌아가신 아빠도 아빠지만, 살아있는 우리 세 가족이 너무 맛있게 즐겨 먹어서 이 제사상을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다.  엄마도 제사 준비가 끝나면 하루이틀은 여기저기 뼈마디가 쑤신다고 한다.  나도 제삿날 밤에는 골반이 비틀어지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내년엔 절대 하지 않겠어!라고 결심하지만 내년에도 여전히 제사음식을 만들고 탕국 넣은 비빔밥에 조기를 열심히 발라먹고 있을 것 같다.



  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보고 싶고 그리운 아빠.  덕분에 올해도 맛있는 비빔밥과 음식과 와인으로 가족들이 함께 저녁 식사를 했어요.  매해 조금씩 조금씩 더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면, 음식가짓수를 더 줄여야겠다 싶은데, 너무 서운해하지 마요.  최대한 내가 많이 배워서 엄마의 손을 대신해 볼게요.  대신에 아빠가 좋아하던 족발이랑 이런 거 저런 거 더 많이 상에 올릴게요.  


  오늘도 참 좋은 날이었어요.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의 조합이 아름다웠어요.  아빠도 잘 지내요.  우리도 잘 지낼게요.  나중에 나중에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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