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줄을 서서 로또를 사는 스페인 사람들
도대체 여름은 언제 끝나는 거냐고 투덜거렸더니,
갑작스럽게 가을이 등장했다.
선선해져서 좋은 것도 잠시.
비염환자는 아침저녁으로 재채기를 하고
부랴부랴 두터운 가디건과 수면양말을 꺼냈다.
올 한 해도 다 갔구나.
인생이란 원래 계획대로 되지 않는 거긴 하지만,
올해는 부쩍이나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러다 로또나 살까 1등에 당첨되면 좀 나아지려나
어리석은 상상을 하며 헤설픈 웃음을 혼자 짓다가
문정성시를 이루던 마드리드의 로또 가게가 생각났다.
마드리드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달리기를 하고 돌아온 그녀는
“시내에 긴 줄이 서있어. 그게 뭘까?”라며
예사롭지 않았던 광경을 설명했다.
아침을 먹고 거리로 나간 우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긴 줄을 선 사람들을 만났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친구를 두고
그 줄의 시작점을 찾아 내달렸다.
사람은 더 많아졌고, 교통 통제 경찰까지 등장했다.
결국 정체를 밝혀낸 나는
혼자만 이 사실을 알고 웃기 너무 아쉬워
깔깔 웃음이 목구멍에서 간질간질하는 것을 참고
다시 친구에게 뛰어갔다.
줄의 정체는 로또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연말이 되면 가족과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돈을 모아 로또를 산다.
혹은 산 로또를 나눠 선물을 하기도 한다.
1등 당첨되면 다 같이 부자가 되자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멋진 이벤트였다.
로또로 인생 역전해 보자는 사람들이
지구 반대편 이곳에도 우글우글하는 걸 보니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군 싶다가도,
나 혼자만 1등이 아니라
다 같이 1등 되면 덜 외롭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거 참 좋은 아이디어다 싶었다.
골목을 돌아 나오니 또 다른 줄이 있었다.
여기도 로또 명당인가 했는데, 서점이었다.
신간 발표한 소설가의 사인을 받기 위해
서점 건물을 빙 둘러가며 줄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이상했고 신기했고 부러웠다.
아닌 게 아니라 이곳 사람들은 책을 좋아한다.
골목마다 책방이 꼭 하나씩 있고,
대형 책방엔 빌 디딜 틈 없이 붐비기도 했다.
우리는 숙소 근처 마음에 드는 중고 서점을 발견하고
시간 여행하듯 들어가
나는 타센의 고야 책을 사고
친구는 오래된 LP를 샀다.
12월에서 1월로 넘어가는 그때
로또 1등은 누가 되었을까? 인생 역전에 성공했을까?
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남은 3개월 안에 인생 역전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스페인 사람들처럼
로또를 한 장 사서 가슴에 소중히 품고
사놓고 읽지 않은 책장 속 저 책들을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좀 더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