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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Sep 08. 2023

중년 아저씨들의 꿈

사촌오빠의 고교 동창, 정확히 말하면 고등학교 중창단 동아리의 정기연주회를 다녀왔다. 경복 글리 앙상블이라고 활동을 안 한 지 10년이 지나 재결성한 거라고 한다. 음악을 전공한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들도 많다고 했다. 이모가 같이 가자고 초대장을 주셔서, 처음에는 솔직히 공연을 본다는 의미보다는 혈육 의리 챙기기를 위한 발걸음이었다. 


무대 한쪽에 문이 열리고 의외의 부드럽고 안정적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객석 여기저기에는 '오~'라는 예상을 웃도는 소리에 조금 감동한 듯한 감탄사들이 나왔고, 이어 머리 희끗하거나 벗어졌거나, 그렇지 않으면 배가 조금 볼록하게 나온 중년의 아저씨들이 나비넥타이와 합창단 연미복, 똑같은 검정 구두를 갖춰 입고 한 줄로 걸어 무대로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냥 직장인 취미라기에는 상당히 안정적으로, 꽤 괜찮은 퀄리티로 공연을 이끌었다. 게스트 합창단의 공연 이후에는 편안한 옷차림에 세시봉 메들리가 이어지면서 슬슬 긴장이 풀렸는지, 표정과 제스처에 여유가 넘쳤다. 


인터미션 후 2부에서는 오빠의 아이리쉬휘슬 공연에 이어 다채로운 합창 공연들이 이어졌는데, 클라이맥스는 중년아저씨들이라 더 어울렸던 '여자보다 귀한 것은 없네', '빨간 구두 아가씨', '여자 여자 여자' 곡이었다. 그저 합창이라기에는 뮤지컬 맛보기를 보는 듯, 맹연습을 연상시키는 연기들과 몸짓에 여기저기서 웃음과 박수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오빠의 얼굴을 난생처음 발견했다. '아, 정말 좋아하는구나. 무대를 즐기고 있구나.' 


공연이 끝나고 박수갈채소리에 관객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하는데, 웃음 띈 얼굴들이 고개를 숙이니, 여기저기 까만 머리 사이 하얀 원형탈모가 몇 군데 보여,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어버렸다. 히사이시 조가 열광적으로 무대 위를 통통 튀면서 오케스트라 지휘하던 대머리 뒷모습이 생각나는 너무 귀여운 아저씨들이었다. 그리고 홍조 띤 행복해하는 얼굴들을 보니, 영화 쉘위댄스가 생각났다.


쉘위댄스는 당시 나에게는 그냥 유명한 영화 중 하나였다. 외로운 중년남성이 취미에 빠지고 행복을 발견하는 과정이 그저 그랬고,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영화였다. 그런데 지금 그 영화가 생각이 났다. 주인공의 아마추어 스포츠 댄스 경기 장면이 생각나면서, 지금 이 무대 위에서 박수를 받고 있는 이 분들이 여름부터의 맹연습이 얼마나 즐거웠을지, 연미복을 단체로 맞추면서 얼마나 설레었을지, 가족과 친구들을 공연에 초대하며 얼마나 걱정하고 기대했을지 상상이 되었다. 


직장과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잘 지키고 성실히 역할을 해내고 있지만, 어느 순간 이게 다 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좀 더 철없고 젊었던 학창 시절에 가지고 있던 꿈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면서, 나는 왜 지금 이러고 있지 라는 아쉬움이 생겼을 것이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었는데, 그런데 난 그동안 무얼 했지 싶고, 쌓아둔 커리어와 업무 스킬은 뒤로한 채 내 삶은 지루하다고만 생각하던 시간도 있었을 것이다. 바로 내가 그렇게 40대의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만족해하는 저 얼굴을 보니 합창 공연 준비를 하며 그런 시간들을 행복하고 감사한 시간으로 바꾸었겠구나 싶었다. 


어릴 때는 하고 싶은 직업이 꿈이고 목표였다. 그런데 그 직업을 가지고 나니 이제는 다시 어린 시절 좋아하던 것들이 다시 내 꿈이 되고 목표가 된다. 그래서 삶은 계속 돌고 돈다. 영원한 결말은 없고, 꿈은 계속 바뀌는 게 당연하다. 오늘 이 공연은 1회가 끝이라, 누군가 이 리뷰를 보고 그 공연을 찾아볼 수는 없겠지만, 주변에 가까운 친구나 가족이 공연을 한다면 찾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공연의 퀄리티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관객을 초청해서 무대에 서는 만큼 최선을 다해 준비를 할 테고, 그 결과물을 보는 건 생각보다 즐겁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저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나 또한 흐뭇해진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하면 저들처럼 행복할까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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