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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Sep 08. 2023

슬픔을 생의 의지로 승화시킨 사람

장일호의 <슬픔의 방문>을 읽고

힘들었던 일을 글자로 적어내면서, 다시 그 일을 떠올리면서, 마음이 뒤틀리는 경험을 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다시 그 시절을 곱씹어 글자로 남겨야 하는가. 왜 나는 나에게 고문을 자행하는 듯한 이 미친 짓거리를 하는 걸까 생각했지만. 하나의 글 꼭지를 마무리하고 나니, 나의 힘듦은 그 글 안에 남겨지고, 과거가 되고, 나는 비로소 현재의 내가 될 수 있었다. 그랬던 경험은 나를 계속해서 글을 쓰게 만들었고, 그 과정은 곪아서 아픈 고름을 이를 악물고 짜내고 약을 바르고 가라앉혀 통증이 사그라드는 것과 비슷했다. 그게 나만 겪는 과정은 아니구나를 이 책의 프롤로그를 보면서 깨달았다. '쓸 때의 나는 여기 없다. 이 글들은 나였던 것,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닌 것이다. (중략) 여전히 '처음'인 많은 것들에 매번 새롭게 놀라면서 다음으로 가고 싶다.' 왜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를 장일호 작가가 명쾌하게 알려줬다.


장일호 작가는 본인에게 찾아온, 그러나 반겨줄 수는 없는 슬픔들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적어냈다. 가난, 죽음, 성폭행, 암투병 등, 절대 반가울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지만, 작가는 이 고통을 자원화할 수 있었다. 외면하지 않고 인정하고 말하고, 그럼으로써 나와 분리하고 그래서 통제하면서 작가는 이 고통에서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고 인생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자유를 찾고 인생의 주체가 되는 과정이 이 책이고 이 책은 그녀의 현재부터 미래를 그리는 새로운 역사가 되었다. 그래서 반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문을 잠그고 닫고 쉬쉬한다고 없는 것이 되고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니니, 책의 제목을 '슬픔의 방문'이라고 정한 것이라 이해하였다. 그간 도대체 어디까지 솔직해야 하는 거야, 어디가 내 바닥인 거야를 계속 되뇌었던 나에게 좋은 길라잡이가 될 책이었다.


솔직하고 담담한 그녀의 이야기가 등뼈처럼 곧게 세워져 있다면, 그녀의 깊은 사유 그리고 그걸 표현하는 문장력, 또한 잘 표현해주고 있는 인용글들이 혈관과 살이 되어 내 눈앞에 아름다운 그녀를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읽는 내내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성평등이란 단순히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커다란 실패를 허용하는 것이라던가, 당당한 병신으로 살아가자는 박경석 노들야학 교장의 외침, 환자가 자신의 방에, 삶의 맥락 속에 있으니 증상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양창모 의사의 말들이 오랜 세월 뱉음과 매만짐으로 만들어진 진주알처럼 단단하고 영롱하게 내 가슴에 쏙쏙 박혔다.


이 책을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읽기 시작해서,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마저 읽었다. 누구에게나 다양한 슬픔들이 있고, 그 슬픔은 어느 날 준비되지 않은 내 방문을 두드릴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당황스럽고 고통스럽겠지만, 방문을 밀고 들이닥친 슬픔을 '없었음'으로 만들 수 없다면 당당하게 손님으로 맞이하고 다시 잘 보내야겠다. 그래서 다시 안락해질 내 방에 그 슬픔의 찌꺼기들이 애매하게 남지 않게 해야겠다. 혹여 다시 그 슬픔이 방문한다 하더라도 나의 경험들이 그리고 달라진 내가 다시 그 슬픔을 잘 정리해서 떠나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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