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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Sep 28. 2023

반갑다 시, 그리고 시인

위트앤시니컬의 유진목 시인 강의를 듣고 

시에 대해서는 지독한 고정관념이 있었다. 시는 함축적이어야 하고, 수수께끼 투성이고, 비유와 관념이 버무려져 있으며, 다소 우울할 수 있고, 무엇보다 무슨 이야기인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시집 한 권 읽어내기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나는 시에 무지했고, 오랫동안 잘못된 편견에 사로잡혀 시를 다시 읽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러던 내가 어느 날 위트앤시니컬에 시를 배우러 갔다. 만일 내가 고정적인 생각에 갇힌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특별한 행동이었다. 계기는 생일선물로 받았던 유진목 시인의 <슬픔을 아는 사람>이라는 수필집과 색다른 것을 해보자는 친구의 제안이었다. 


시를 접해본 경험도 별로 없으면서, 무모하게 시작한 6강에 이르는 '시 쓰기 수업'은 오히려 좋았다. 이 수업을 통해 멋있는 시를 쓰겠어! 와 같은 욕심스러운 목표는 없었으니 부담이 없었고, 시 쓰는 과정을 알고 나니 시를 어떻게 보고 즐겨야 할지 감을 조금 잡게 되었다. 게다가 내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이 매우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시가 어렵다. 40년 넘게 시가 어렵다 생각했으니, 단 6주에 걸친 경험만으로 크게 변화하진 못했다.  그렇지만 유진목 시인이 알려준 방법으로 꾸준히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시를 쓰게 된다면 브런치에 올리고 부족함에서 오는 그 부끄러움을 온몸으로 맞으며 더 잘 써보고 싶다는 욕망을 채찍질하기로 결심했다. 


여기 그 강의의 마지막 과제로 썼던 시를 조금 수정하여 내놓으며, 생경하고 그랬기에 즐거웠던 유진목 시인과 함께한 수업을 추억해 본다. 시를 읽고 쓰는 맛을 조금 더 알게 되면, 그때 다시 시인의 수업을 들어봐야겠다. 




고해성사


나는 없고 너는 있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피비린내에 눈을 떴지만 나는 없다. 

나는 누구지?


담배 피우던 남자가 물었다. 그녀를 사랑했느냐? 

그녀가 누구냐?

그녀를 왜 버렸느냐?

나는 버리지 않았다. 쓸모가 없어졌을 뿐.

그녀에게 미안하지 않느냐?

나는 외로울 때 옆에 있어주었다. 너를 그리워할 때 나를 그리워하게 허락했다. 사랑이 필요할 때 나를 사랑하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전부가 되어주었다. 나는 미안하지 않다.


말 한마디에 새끼발가락 하나, 또 한마디에 새끼손가락 하나, 불 속으로 사라진다.

화염이 되어 날아간다


이것은 너의 고해성사 

늙은 여자의 이마가 구겨지고 어깨가 들썩인다. 그곳엔 호수가 있다. 파도가 잠잠해지고 먼 곳 짐승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새벽이 찾아온다.

문은 닫히고 칸막이가 열리지만, 그곳에 신은 없다.


그림자가 길어지는 시간, 그와 나는 담배를 피운다.

이 시간은 그에게 후회의 시간, 아니 다음 타깃을 찾는 시간, 도망칠 궁리를 하는 시간


한 모금에 눈이 감긴다. 붉은색 그림자가 화염에 어른거린다. 

나의 고백, 그리고 너의 아픔 

그러나 나는 사랑은 없었다. 

담배를 끊었어야 했어.

담배 연기에 입맛을 다신다.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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