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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Sep 30. 2023

토닥토닥. 괜찮아, 정말 괜찮아

박연준의 <고요한 포옹>을 읽고

그런 책이 있다. 다 읽고 덮었는데, 책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기분만 남는 책. 제목도 가수도 모르지만 기분 좋은 음악을 막 들은 것처럼, 갓 구운 따끈한 빵과 방금 내린 커피 향을 맡는 것처럼, 저 멀리 보고 싶었던 사람이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나를 기다리고 있는 포근한 침대와 하얀 침구를 볼 때의 기분 같은, 그런 기분이 남는 책이 있다. 박연준 시인의 산문책, 고요한 포옹이 그랬다. 책을 다 읽고 덮자, 말캉하고 따뜻한 품 안에 잠시 안겨, 한숨을 후 내쉬며 긴장을 풀게 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제목이 포옹이다 보니, 그 책 겉표지와 제목을 다시 보니 그런 기분이 들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지 않았고, 어설프게 위로하지 않아서 편안했다. 


이 책에는 책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남편과 집의 주인 같은 행세를 하는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가 있다. 생활하며 있었던 아주 짧은 소소한 이야기들에서 번지는 시인의 깊고 넓은 사유가 있다. 시인이 좋아하는 다른 시와 시인에 대한 감탄과 예찬, 새로운 발견들이 있다. 같이 버무려진 이야기들도 좋았지만, 그 이야기에서 번져간 시인의 사유와 생각의 흐름이 더 돋보였고,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고 너무 수월했다. 그렇게 말로 글로 독자의 생각의 흐름까지 잘 이끄는 문장들을 보며 역시 작가는 작가구나 싶었다. 그 문장들은 나를 휘감았고, 포근하게 안아주었고, 친절하게 속삭여주었다. 


책의 내용이 생각나지 않아, 책을 다시 펴서 맘에 들었던 구절들을 찾아 읽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노력, 남들을 따라서 하는 노력은 나를 지운다. 이러한 노력은 인생을 무겁게 만든다. 의무감으로 살게 하고 삶을 버텨야 할 시간으로 느끼게 한다.' 나는 현재 친구와 동료들과 함께 타고 가던 빠른 열차에서 내려 나를 찾는 여정을 시작했다. 그래서 이 글은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나의 여정을 응원하는 포옹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런 글도 있다. '어른의 공부는 시작도 끝도 없다. 진도가 쉬이 나가지 않으며 정답이 없다. 아이 때 쉬웠던 일도 어른이 되어서는 쉽지 않다. 뻔뻔하지 않은 어른, 수줍음을 잃지 않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 나는 이제 막 사회라는 알을 깨고 나와 새로운 것들을 배워가고 있다. 전두엽이 말랑말랑하고 죽을 때까지 아이 같은 호기심을 가지고 싶다. 그래서 이 글 또한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을 응원하는 듯하다. 우직하게 가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나의 등을 토닥토닥 쳐주는 기분이 든다. 


박연준 시인의 산문은 미술관에서 조각상을 바라보는 기분도 든다. 그의 감정이나 생각은 입체적인 조각이고, 그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면만 봐서는 안된다. 360도 돌아가며 그리고 위아래 훑어보고 생각하고 이해하게 된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표현했다. 드러내고자 하는 것들을 그의 생각을 여러 면에서 보이는 것을 툭툭 내던지듯 표현하는 귀여운 습관이 있었다. 나는 그 표현과 습관이 맘에 들었다. 


유진목 시인의 수필인 <슬픔을 아는 사람>을 보고 그 후 그 시인이 궁금해져 그의 시를 찾아봤을 때, 시에 무지한 나지만,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공통된 어떤 것을 느꼈다. 그건 음악이나 소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차분한 공기를 가르는 동그랗게 울리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동굴 안에서 조금 슬프게 이야기하는 기분이 드는 글들이었다. (이왕이면 강동원씨의 목소리면 좋겠다. 유진목 시인은 강동원씨의 목소리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수필이지만 시에서 파생된 글 같았고, 시인의 수필은 다르구나 싶었다. 고요한 포옹을 보면서, 박연준 시인의 시도 그럴까 궁금해졌다. 그의 시는 소리를 낼까? 어떤 음악이 흐를까? 산문과 시가 공통된 소리와 음악의 색깔을 띤다니, 대단한 작가의 시그니처가 아닌가. 짧은 소견이지만, 시인만이 그런 음악 같은 소리를 산문에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생각이 그렇게 미치자, 그의 시가 많이 궁금해졌다. 


같은 책을 두 번 읽은 적은 잘 없지만, 이 책은 두 번 읽어야겠다 싶다. 앞부분은 하루에 한두 편씩 영양제를 챙겨 먹듯 보고, 뒷부분은 그가 추천한 시를 찾아보고 다시 봐야겠다 싶다. 그의 산문이 시를 읽은 나에게 다정한 뒷문이 되어 그 시가 어떻게 나를 통과했는지, 나에게 머물렀는지, 무엇을 남겼는지를 함께 이야기해 봐야겠다. 그래서 그날은 박연준 시인이 이야기한 것처럼, 나태함이란 가운을 입고,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느끼며 휘청휘청 걸어야겠다. 그럼 그날은 뜬구름처럼, 완벽한 하루일 게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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