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모습 보여도 괜찮아

4장. 행운도 알아보는 자에게 먼저 갑니다 (3편)

by 니나

‘어휴~ 정말 손 많이 가. 나 없으면 어쩔 뻔했어.’ 회의실에서 T가 화상 미팅 용 전화기 조작을 잘못해서 허둥대고 있었더니, 동료 J가 결국 회의실로 들어와 이것저것 만져주고 고쳐주고는 핀잔인지 애정인지 알 수 없는 말 한마디를 툭 던지고 나갔다.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라는 말은 어쩌면 흉일 수도 있겠지만, 그 회의에 들어와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다 안다. 애정이 듬뿍 담긴 대거리 같은 말이라는 것을. 그건 팔꿈치로 괜히 팔을 툭툭 치거나 어깨에 손을 살짝 얹었다 지나가는, 야근하는 동료에게 초콜릿이나 하루 견과 같은 걸 하나 툭 던지듯이 놓고 가는, 표정 어두운 동료에게 맥주 한잔하겠냐고 슬쩍 물어보는, 그런 츤데레같은 말이다.


T는 회사에서 손 많이 가는 사람 TOP3 안에 들 정도로 글로벌 IT 회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자칭 컴맹이다. 컴맹이라서 파워포인트 쓰는 게 느리고 화상 미팅 기구를 조작하는 게 어색하다고 하지만, 특이하게도 맥북 키노트(파워포인트와 비슷한 맥북 전용 프로그램)는 귀신같이 잘 쓴다. 그래서 가끔은 주변의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는 전략인가 싶기도 했다. 각설하고, 그렇다고 그의 컴맹 기질은 전혀 흠이 되지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을 덮을 정도로 그는 자상하고 남을 배려하는 매니저이면서 전략적이고 창의적인 문제 해결 능력과 성실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나름의 힙한 패션을 추구하는 개성 강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회사에 팬이 많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다. 매사 깔끔한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흐트러진 모습을 보았을 때, 바늘 찔러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사람이 별것 아닌 것에 감정이 우르르 무너진 모습을 보였을 때, 그러니까 완벽한 줄만 알았던 그가 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을 때 평소 가지고 있던 존경에 애정을 한 스푼 더 얹는다. 도도한 고양이가 혼자 우다다를 하다 벽에 머리를 부딪히곤, 안 아픈 척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인 양 고상하게 벽에 기대어 다리를 우아하게 핥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마음과 조금 비슷하다. 친구 A도 그랬다. 평소 새침하고 깔끔하고 빈틈없을 것 같은 그가 카페에서 컵을 치우려고 몸을 휙 돌릴 때, 컵이 원심력으로 궤도를 이탈하여 바닥에 쨍그랑하고 떨어졌고 동시에 그의 입에서 ‘어머!’라는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왔을 때, 그 원심력만큼 나는 그에게 구심력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좋아하는 이들의 집을 찾아가는 걸 좋아한다. 그 사람의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 들어서면, 밖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가장 연하고 부드러워 나약하기까지 한 속살이 보인다. 정신없이 많은 책과 물건이 가득한 집에서는 그의 다양한 취향을, 어지럽게 널브러진 아이의 빨래 더미에서는 따뜻한 부모의 모습을, 설거짓거리가 남은 싱크대에서는 바쁘고 정신없는 삶 속에도 나를 초대해 준 애정을(나 먹이겠다고 이것저것 만든 후의 풍경이었다) 찾을 수 있었다. 그럼 나는 그 속살에 기대어 같이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앙증맞은 아이 빨래를 같이 개고, 재채기하면서도 그의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골골송을 듣고, 책장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그의 책을 구경한다. 단단한 껍데기 겉에서 맴돌다가 어느 순간 발견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 사람의 삶에 나의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그가 나를 기억하도록 인생의 아주 작은 조각에 나를 새긴다.


그러니 틈을 보여도 된다고 생각한다. 틈은 숨기면 숨길수록 메우지 못한 구멍이 되기도 하지만, 내놓는 순간 무방비로 웃는 얼굴의 눈 옆 자글자글한 주름이 되고, 쉴 틈 없는 미팅 시간 사이 커피를 내릴 수 있는 시간이 되고, 두툼한 니트를 입어도 괜찮은 넉넉하고 따뜻한 잠바가 된다. 틈 사이로 부드럽고 상처받기 쉬운 속살이 보이더라도, 그건 T를 챙기는 J의 마음이 덮어줄 것이다. 누군가 대신 덮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그 속살, 세상에 내놓아도 된다. 세상에 나온다고 생채기가 꼭 생기는 건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구조조정 대상자라는 사실을 처음에는 가까운 친구와 가족에게 이야기했고, 이어 궁금해하는 직장동료와 업계 사람들의 질문에 답했고, 이제는 세상에 이 글을 통해 절절히 고백하고 있다. 처음 회사에서 메일을 받고 황당함과 배신감에 몸서리치면서도 동시에 들었던 생각은 ‘구조조정 대상자로 잘린 사람’이라는 주홍글씨가 가슴에 새겨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책임이 아니고, 나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나를 지키고 싶었지만, 회사의 무자비한 선택에 희생양이 되었고, 그것은 나의 몸에 달라붙어 상처를 내고 틈을 만들어 속살을 겨누었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 그냥 내놓았다. 손아귀에 쥔 것이 무엇인지 펴보고자 안간힘을 써보는 세상에 그냥 내 손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세상은 더 이상 그것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 비밀이었지만, 이제 비밀의 매력은 떨어지고 약점은 사라지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있다.


손바닥을 펴고 가진 것을 내보이며 비밀을 고백하는 것. 이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고, 책임이 뒤따르는 일이다. 은희경 작가는 ‘글을 쓰는 것은 나의 내면을 남에게 내보이고 또 설득하는 일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라며 글을 쓰다 막히면 무령왕 탄생지로 전해지는 일본의 가카라 섬에서 주워온 돌을 쥐어보며 글을 끝마치려 노력한다고 했다.** 나도 글을 적어 내리기 힘들어질 때마다, 이 글을 쓰는 것이 두려워질 때마다, 써 내려온 나의 글을 보고 나를 응원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다시 기운을 차린다. 그럼 그 순간 나는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 용기를 낸 사람이 된다.



** 은희경의 <또 못버린 물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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