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ilience (회복탄력성)에 대한 고찰

4장. 행운도 알아보는 자에게 먼저 갑니다 (2편)

by 니나

나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의 정체를 어려움을 해결해 줄 영웅의 등장을 기다렸다. 어지간히 연차 쌓인 내가 다시 믿고 따르고 배우고 싶은 어른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끝에 한국 지사로 새로운 대표가 부임했다. 회사에서 첫 구조조정을 강행하기 몇 개월 전, 2022년 여름이었다. 그는 담당하는 부서의 전 직원과 일대일 면담을 진행하고, 사업 현황을 검토한 후, 리더십 그룹과 논의하여 조직개편을 발표했다. 그러나 조직개편에는 사전 예고와 달리 사람들의 예상을 웃도는 변화가 있었고, 많은 직원이 당황했고, 조직은 웅성거렸다. ‘로란님이라면 가만있지는 않을 텐데.’라는 뒤통수에서 들리는 말에 연차 높은 직원의 괜한 사명감일지, 회사에서 내 존재감을 자랑하고 싶은 속셈일지, 알 수 없는 의무감과 영웅심리인지에 흠뻑 고취되어, 나는 그에게 면담을 요청했었다. 그간 회사에서 실무자와 리더십의 소통 과정에서 다리 역할을 종종 해왔던 터라 내 이야기를 들어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설사 내 의견이 반영되지 않더라도, 실무의 의견과 현재 사무실의 온도를 전달해 주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간 그의 업무 성과와 평판을 듣고 그의 부임을 기다려왔던 나는 성급하게도 그가 내 행동의 의미를 알아주리라 생각했었다.


내가 과거형으로 쓰는 것은 내 기대가 완전히 틀렸고, 면담은 망했다는 뜻이다. 경험 있는 조직 리더라면 이런 변화에 구성원의 반발은 당연히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좀 더 대비하고 준비해서 그를 만났어야 했다. 그의 단단한 생각을 뚫고서라도 내 의견을 전달할 생각이라면, 만반의 준비가 된 방패들을 뚫고 창을 꽂으려면, 물렁한 생각이나 결심만으로는 부족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리석었고, 순진했다.


그는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같았다. 준비해 간 이야기의 절반도, 아니 절반의 절반도 꺼내지 못했고, 첫 몇 마디에서 발현된 예상하지 못한 질문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빠르게 뻗어나갔고, 나는 그 질문들을 잡고자 허우적거리며 방어하기 급급했다. 미팅은 의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듣지 않으려는 그의 모습에 당황했고, 이어 수려하고 빠른 언사와 질문에 밀려 내가 준비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정체불명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팔에 닭살이 돋고 뒤통수가 당기고 머릿속은 멍해지고 콧잔등에는 땀이 났다. 입을 열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고,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문장들에 심장이 두근거렸고, 무겁고 낯선 공기에 떠밀리듯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는 ‘로란님은 Resilience (레질리언스, 회복탄력성)이 약하군요.’라는 피드백과 함께 몇 가지 온라인 교육을 받으라는 지시를 전달받았다. 그 교육의 주제는 '피드백 주고받는 방법'이었고, 1시간 남짓하는 영상을 보는 내내 머릿속에는 '치욕'이라는 단어가 떠다녔다.


당시 회사에서는 Efficiency(이피션시, 업무 효율성)와 Resilience(레질리언스, 회복탄력성)라는 단어가 유행이었다. 이피션시는 쉽게 이해가 되는 편이었다. 적은 리소스로 최대의 결과를 뽑아내자는 것이니, 임원진은 예산을 줄이되 결과는 여전하기를 바랐고, 직원은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해내야 했다. 그래서 이피션시가 높다 낮다는 것에 대한 기준과 평가는 비교적 명확했다. 그런데 레질리언스는? 단어 자체도 어렵거니와 한글로 해석한 회복탄력성이라는 말도 그 의미가 명확하게 와닿지 않았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의미나 기준도 달랐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직원들은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는 기질이나 인내력’ 정도로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천성적으로 밝은 사람이다. 아니 낙천적이라는 말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사건에 대해 긍정적인 면을 먼저 보는 편이고 사람도 쉽게 믿는다. 그렇다고 내가 살아온 과정에 어려운 일이 없었냐. 또 그건 아니다. 말하기 주저되는 비밀스러운 힘듦이 있고 답답한 가정사나 개인사도 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 닥쳐도 고민 끝에 해결 방법을 찾아낸 적도 있었고, 방법이 묘연할 때는 눈앞의 일부터 하나씩 해치우다 이내 막막했던 앞이 조금씩 열리는 경험을 한 적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레질리언스가 높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면담을 통해 나는 그 기질을 부정당했고, 한동안 지속해서 나 자신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미팅 이후 뒤통수가 당기는 느낌은 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아무 일 없었던 듯 괜찮다가도 그때의 작은 조각이 불쑥 떠오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멍해지면서 귀에는 윙윙 소리가 났다. 한국 대표에게 면담을 요청했던 커피 머신 앞을 지나거나, 회의실을 나와 자리로 돌아가던 그 길을 다시 지나게 되면 어김없이 그때의 몸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내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자책에 빠졌다. 잠들기 위해 누웠다 낮에 한 실수가 생각나 이불을 차는 정도가 아니라, 오랫동안 공들인 프로젝트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처럼, 아니 내 오랜 사회생활의 경력과 평가가 한순간에 무너진 것처럼, 내 속의 어딘가가 부서지고 무너져 먼지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가 듣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설익은 과일을 따 먹으려 한 것처럼 준비가 부족했고 성급했던 나에 대한 자책이었다. 들어주리라는 순진한 착각에 빠져 만반의 준비를 해도 부족했을 면담을 망쳐버린 나의 어리석음에 대한 책망이었다. 어두운 소용돌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나를 두고 친한 직장동료 Y는 괜찮냐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여러 번 물어봤지만, 그 몇 분간의 일을 차마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그 시간을 생각하면 울렁거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떠밀리듯 회의실을 나온 내가 창피했다. 그에게 용기 있게 면담을 신청했으면서 그 정도도 예상하지 못했느냐는 핀잔을 들을 게 뻔했다. 내가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다는 것이 들킬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회복탄력성이 약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누구나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사고를 당할 수 있고, 나처럼 실수하고 끝이 없는 후회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역경을 직시하고 해결하려 노력하고 그 과정을 인내하면, 원래 혹은 그보다 더 나은 상태로 회복할 수 있다. 즉 회복탄력성은 일단 역경과 시련과 실패 같은 것이 먼저 발생하고 그 안에 빠져 괴로운 상태가 되어야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는 조직개편이라는 큰 변화를 직시하고, 문제가 되는 지점을 발견했고, 더 나은 조직을 위해 면담을 신청했었다. 그 미팅은 비록 참담하게 끝났지만, 그걸 시도한 것은 더 잘 이해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나의 적극적 변화 수용 의지였다.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말하지 않고, 실수가 두려워 포기하거나, 나에 대한 평가나 질타를 걱정해 그저 참고 인내하는 것이 회복탄력성은 아니란 뜻이다.


지금 나는 그 시간을 비교적 담담하게 복기하고 쓰고 있다. 쓰는 행위를 통해 생각하고 기록하고 벗어나기 위해. 그때를 떠올리는 지금, 잠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니 나에게는 그냥 지나칠 작은 사건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일이 미래에 다시 일어난다면, 나는 그때처럼 그에게 면담을 요청할 것이다. 당장에는 또 진흙탕에 빠지더라도 부딪힐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와의 싸움에서 질지언정, 빈 종이와 펜이 나를 바라보는 비로소 혼자만의 시간에 돌아왔을 때, 최소한 나에게는 비겁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피할 수는 없겠다. 나의 Resilience (회복탄력성)에 기대어 상대의 단단한 마음을 끌어안고 다시 한번 품어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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