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잘 먹고 잘 자고 잘 놉니다 (10편)
평일을 주말처럼, 주말은 평일처럼 지내고 있다. 일요일 밤이면 아무리 피곤해도 끝나가는 주말이 아쉬운지 잠이 안 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먹다 남은 와인이라도 한잔 먹고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 가는 패턴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는다. 월요일 아침 오만상을 찌푸리며, ‘가기 싫다 가기 싫다’를 속으로 되뇌며 일어나는 일도 없다. 토요일 엄마가 실수로 “오늘 일요일이지?”라고 했다가 내가 “깜짝이야. 오늘 토요일!”이라며 버럭 하는 일도 더는 없다. 대신 금요일 오후 우연히 시계를 봤는데 4:44라는 숫자를 봤을 때 왠지 로또를 사야 할 것 같은 기분은 더 이상 들지 않고, 목요일 해가 질 때쯤이면 야근하는 사람 들이랑 맥주라도 한잔할까 하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평일과 주말 구분 없이 하루하루가 비슷하고 단조롭다. 그리고 평화롭다.
회사원일 때나 백수인 지금이나 주말 하루는 집에서 엄마와 보냈다. 특별한 일 없어도 점심쯤에 집으로 가서 같이 밥 먹고 같이 커피 마시고 수다 떨고, 그러다 아파트 뒷산에 가기도 하고 마트에 가기도 하고 감자나 떡을 쪄먹고 저녁이 되면 뭘 먹을지 고민하다, 감자 먹은 배가 아직 꺼지지도 않았는데 냉면이나 콩국수나 수제비나 파전이나 그런 가벼운 별미 같은 것들을 해 먹고, 더부룩해진 배를 두들기며 예능을 보거나 동네 한 바퀴 산책한다. 백수가 되고 나서는 주말 하루 외에도 평일 하루 정도를 엄마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20년 만의 백수 생활이다 보니 부작용이 하나 생겼다. 내가 집에만 가면 엄마는 오늘이 주말인가 하고 착각한다는 데에 있다. 어떤 날은 주말에 바빠 월요일에 집에 갔었다. 같이 밥 먹고 커피 마시고 빵이랑 떡도 꺼내먹고 냉장고 과일을 축내면서 거실 소파를 차지하고 있으니, 엄마는 “오늘 일박이일 왜 안 하지?”라며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아 참! 오늘 월요일인가? 네가 있으니까 또 주말인 줄 알았네. 병원 가야 하는데 깜빡했네. 내일 가야겠다.”라고 한다. 그런 비슷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덩달아 나까지 요일이나 날짜가 헷갈려서, 핸드폰의 오늘 날짜를 수시로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엄마는 나에게 그다지 잔소리하지 않는다. 속으로는 엄청나게 걱정하는 것 같은데, 당신의 걱정을 말로 표현하거나,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 어릴 때 나는 엄마가 무서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섭다기보다는 카리스마를 종종 느꼈었다. 평소에는 그냥 수다스럽다가도 중요한 이야기는 한두 마디로 끝내다 보니, 그 말의 무게가 달랐다. 엄마의 말 한마디는 백번의 잔소리가 함축된 것이라는 걸 어렸을 때부터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사람마다 말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도 그래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엄마와 반대로 아빠는 잔소리가 상대적으로 더 많던 편이라 한 문장의 무게가 엄마보다는 아주 가벼웠었다) 그래서 내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알아볼 때도, 나이가 차고 넘쳐서 ‘넌 결혼 안 해? 언제 해?’라는 불편하고 무례한 질문을 남에게 수십 번 수백 번 들을 때도 엄마는 정말 참고 참아 한마디 툭 던지고는 다시 그 말을 삼켰다. “그래, 너네는 도대체 언제 결혼할 거니?” 이 말도 남자친구랑 내가 거의 10년을 만날 때쯤 한 말이니 엄마의 잔소리 인내심은 끝이 없다. 정말 존경한다.
회사를 그만두고도 그런 엄마의 인내심은 빛을 발했고, 그게 나에게는 배려가 되어 다가왔다. 가끔 웃으며 “요즘 좋은 소식은 없고?”라며 면접 보는 곳은 없는지 은근히 물어본 적은 두어 번 있지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말 없이 ‘그래, 어디까지 노는지, 한번 보자.’ 태세로 나를 지켜보는 눈빛이 고맙다. 물론 난생처음 날아온 건강보험 지역 가입자 통보지와 보험료가 찍힌 지로용지는 ‘현재 당신 딸이 백수요.’라는 것을 못 박는 증거자료라 영 못마땅한지, 나 보란 듯 한동안 식탁 위에 올려두긴 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내가 구조조정으로 퇴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래 너도 많이 고생했다. 좀 쉬어라.”라고 해준 말이 눈물겨웠다. 어쩌면 그 이후 엄마는 못마땅한 눈빛 레이저를 나에게 쏘아댔을 수도 있고 뭐라고 또 잔소리했을지 모르지만, 쉬라는 그 말이 뇌리에 박혀 그 외의 것들은 내가 못 알아듣고 눈치를 못 채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눈치라는 분야에선 영 젬병인 사람이니까 말이다.
엄마와 나는 길 건너 대각선 맞은편에 산다.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야 하고 아파트 입구부터 실제 집까지 들어가는 길이 꽤 길다 보니, 말이 길 건너이지 도보로 15분 정도 걸리는 애매한 거리다. 그런 애매하게 가까운 거리에서 백수인 딸이 집에 혼자 틀어박혀 있다고 생각하니 내가 여기서 종일 뭘 하는지 많이 궁금한가 보다. 그래서 엄마는 거의 매일 ‘뭐 하나? 밥 먹으러 오지?’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밖에 나가 있던 적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가끔은 집이지만 외출하기가 귀찮아 ‘집인데, 그냥 집에서 밥 먹을래’라고 답을 하면 기어코 뭐라도 싸 들고 온다. 찌개를 끓여서 냄비째로 랩으로 밀봉하고 그걸 또 조심조심 가방에 넣어 반찬이랑 싸 들고 와서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며 안겨주고 가기도 하고. 이것저것 과일을 싸다가 주고 가기도 하고. 밥은 있냐며 냉동 밥 몇 개씩 건네 줄 때도 있고, 마트에서 사 온 식자재를 조금씩 나눠주고 가기도 한다. 혼자 살기는 해도 나도 마흔이 넘었고 웬만큼은 해 먹기도 잘해 먹고 김밥이나 피자 가게는 물론 브런치 가게에 이자카야, 심지어 킹크랩 배달 전문점까지 상가에 있어 배곯을 일은 전혀 없는데, 그래도 걱정인가 보다. 어떤 날은 ‘밥 먹고 다녀’라고 하며 하얀 봉투의 금일봉을 받기도 했다.
나는 시쳇말로 K 장녀로 나고 자랐다. 누나니까 동생 배려해야 한다는 말도 참 많이 들었고, 첫째라 의젓하네! 라든가 엄마 아빠는 너를 믿는다는 말을 인생 최고의 찬사로 생각하고 커왔다. 그래서 남보다 더 잘하지는 못해도 뒤떨어지지는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학창 시절 공부도 곧잘 했고 IMF 때는 퇴직한 아빠를 배려한다며 내가 나서서 장학금 주는 학교를 찾아갔다. 대학 졸업 전에 취업에 성공했고, 그 이후로도 쉼 없이 이직하며 커리어를 쌓았고, ‘우리 딸 OOO 다녀.’라는 은근한 자랑을 할 수 있게 이름 있는 큰 회사도 다녔다. 회사에서 승진하고 난생처음 이사 직함이 찍힌 명함이 새로 나왔을 땐 엄마에게 가장 먼저 그 소식을 전했다. 살가운 애교라고는 약에 쓸래야 없는 무뚝뚝한 부산 출신이지만 매달 적게나마 용돈을 드리고 있고, 가능한 엄마 수다는 즐겁게 듣고 있으며, 맛있는 게 보이면 종종 와인이나 막걸리랑 같이 사 들고 가 집에서 가족끼리 술판을 벌인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여태껏 결혼을 안 했다는 점 빼고는 크게 문제가 없는 딸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장녀라는 어깨의 짐이 무거웠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부산에 살던 엄마와 동생이 나와 함께 서울에서 살게 되었을 때,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는 아빠를 대신한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아팠고 힘들었고 그래서 쓰러져 병원에 가기 직전까지 매일매일을 투덕거리고 부대끼며 살았던 엄마와 동생은 아빠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몸무게 앞자리가 바뀔 정도로 충격을 받고 우울했고 날카로웠고 자신을 돌보지 못했었다. 나라도 정신 차려야겠다 싶었다. 내 약한 감정은 숨기고 더 의젓하고 더 든든한 기둥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그 이후로 굳어져 십 년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단단한 껍데기가 되어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래서 회사로부터 정리해고를 통보받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나 앞으로 어떡하지.’가 아니라 ‘우리 가족은 어떡하지.’ 였었다. 나는 우리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이니까. 그 책임감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붙어서 무겁게 나를 누르고 있었고, 그래서 내가 졸지에 백수가 된다는 사실은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집의 문제라고 인식했었다. 그래서 빨리 비슷한 직장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첫 번째 과제로 두고 부지런히 달렸었다.
그러나 생각만큼 이직은 쉽지 않았고, 나는 거듭 좌절했다. 내가 아닌 우리의 문제라고 인식한 이후부터는 더 조급해졌다. 내 잘못으로 우리를 흔드는 문제가 생긴 것 같았고, 내가 부족하여 우리 가족에게 위기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너무도 소중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가족이 그리고 그간 나의 역할이 내 어깨와 목에 매단 닻처럼 크고 무거웠을 때, 그래서 그게 나를 지탱하고 떠내려가지 않게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옥죄고 압도하여 무서웠을 때, 남자친구 앞에서 엉엉 울어버린 적이 있었다.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고 싶은데, 나도 책임감 없이 내 멋대로 하고 싶은데, 나는 그러질 못해. 나는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데, 가끔은 너무 버거워. 다 버리고 훌훌 떠나고 싶다가도 미안해서 그럴 수가 없어. 나는 그런 위인이 못 돼.’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던 내가 이기적이고 못돼 보여서 또 그렇게 나 자신이 미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 걱정과 달리 엄마는 “그래 좀 쉬어라.”라며 등을 쓸어주었다. 백수가 돈은 있겠냐며 용돈을 주었다. 늘 동생이라고 하찮은 걱정을 했던 그 녀석은 하던 프리랜서 일이 잘되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배달앱으로 족발이나 샤브샤브나 해물탕이나 팥빙수나 우리가 좋아하는 그런 것들을 내가 집에 갈 때마다 줄기차게 주문해서 나를 먹이고 있다. 정 안되면 너한테 들러붙는다고 말해도 씩 웃으며 ‘그러던가, 내가 요즘 좀 잘 나가니까, 누나는 글 써라.’라는 친남매라면 하지 못할 낯간지러운 말도 해준다.
내가 회사를 나온다고 이야기하고 나서도, 내가 진짜 백수가 되어 건강보험 지역 가입자가 되어도, 내가 평일인지 주말인지 헷갈리게 엄마 집에 불쑥 나타나도, 우리 집은 여전하다. 희뿌연 우울감이 안개처럼 깔려있다거나, 괜한 말로 상처 줄까 봐 미리 조심하며 경계한다거나, 먹고살 걱정에 전전긍긍한다거나 하는, 내가 조금이라도 우려하던 것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 집은 여전히 엄마의 수다로 시끄럽고, 방보다는 다들 거실에 나와서 리모컨 싸움을 하고 있고,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신 후 소파에 기대어 낮잠을 자다가, 저녁이 되면 허리에 붙은 살을 걱정하면서도 또 뭐 먹을지를 같이 고민했다.
그렇고 그런 평범한 일상들이 이어지자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어깨에 무겁게 짊어지고 있던 그 짐은 사실 내가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가장이라는 역할을 나에게 부여하면서 내가 우리 가정에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자긍심을 스스로 만들고 가두었다는 것을. 나의 욕망을 억누른 건 가족의 바람도 기대도 그 무엇도 아니고 나 자신의 과도한 책임감이었다는 것을. 나는 잘 나가는 회사 이사일 때도, 하릴없이 소파에 붙어있는 백수일 때도 엄마의 딸이고 동생의 누나라는 것을. 내가 뭘 하든 가족은 나를 지지할 것이고 사랑할 것이고, 우리 가족은 내가 이끌거나 지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모두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서로 손을 잡고 있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그 순간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패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좌절하면 잡아주고, 내가 돌아오면 반겨줄 가족이 있다는 당연하고 고마운 사실을 새삼 발견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는 이제부터 K 장녀를 하지 않을 거야.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었고, 나도 이제 하지 않을 거야. 대신 그동안 못했던 것들을 하며 살 거야. 나를 찾고, 나를 챙기며 살 거야.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무얼 하고 싶은지, 앞으로 내 인생에서 크든 작든 소소하든 모든 결정은 내가 중심이 되어 생각할 거야. 내 인생의 목적과 목표를 주변에 두지 않을 거야. 앞으로는 내 안에서 찾을 거야.’
오늘도 날이 참 좋다. 나는 눈곱도 떼지 않고 잠옷을 입은 채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엄마에게서 ‘연어회 사 왔다. 족발 말고 오늘은 이거 먹자.’는 메시지가 왔다. 슬슬 씻고 길 건너 맞은편으로 건너가 봐야겠다. 가는 길에 엄마가 좋아하는 와인을 한 병 꺼내 가거나, 마트에서 막걸리를 한 병 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