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장수커플의 시각
눈부신 아침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단잠을 깨웠다. 눈만 뜨고 누워 그대로 천장을 응시했다.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도 내가 가진 지식과 상식선에서는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믿을 만한 구석이라고 떠오른 사람은 봉수였다. 벌떡 일어나 눈곱만 떼고 바로 봉수네 집으로 달려갔다. 우리 집에서 봉수의 집까지는 3분 거리였기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초인종도 있는데 굳이 문을 두드려 곤히 잠들어 있는 봉수를 깨웠다. 회색빛이 도는 철로 된 현관문을 두 세 차례 두드리자 드디어 문이 열렸다. 눈을 부비적 거리며 앞에 서있는 사람은 봉수가 아닌 그의 여자 친구였다.
“어.. 도심이구나..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봉수랑 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
“그래? 그럼 일단 들어와 춥다.”
시계를 보니 오전 6시 17분을 가리키고 있다. 아마 봉수가 여자 친구와 같이 있는 줄 알았다면 이렇게 이른 시간에 찾아오진 않았을 거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봉수의 여자 친구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몸을 일으키고 있는 봉수가 보였다. 아침부터 무슨 급한 일 있냐며 잠이 덜 깬 얼굴로 발을 질질 끌며 눈을 비볐다. 눈과 입이 부어서 누가 보면 벌에 쏘인 것 같이 생겼다. 나는 속으로 저렇게 생겼는데도 저렇게 오래 만난 여자친구가 있는 게 참 미스터리라고 여겼다. 잠을 깨려는 목적으로 봉수는 담배를 한 대 피운 뒤 들어와 거실에 셋이 둘러앉았다. 봉수에게 진지하게 묻고 싶었는데 괜히 제삼자가 있으니 더 떨려서 말을 꺼내기가 망설여졌다. 계속 우물쭈물하고만 있으니 둘은 슬슬 짜증 난다는 듯한 말투로 빨리 얘기해보라며 다그치기 시작했다.
“너네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사랑은 뭐야?”
“풉...”
“푸훗..”
봉수와 그의 여자 친구는 내 진지한 질문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 마주 보며 실없이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깔깔대며 웃다가 내 진심이 묻어난 표정을 보더니 장난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선뜻 누가 먼저 나서서 이렇다 할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 말을 잘못 뱉었다가는 다툼이 될 수 있기에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웃다가 이제는 서로 눈치만 보며 먼저 얘기해 보라며 떠밀었다. 나는 책상에 양 팔꿈치를 올리고 두 손을 모아 양 손가락의 깍지를 끼고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 기다린 끝에 봉수의 여자 친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쉽게 정의할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건 믿음이 아닐까? 내가 얼마큼 마음을 열고 상대를 대하느냐에 따라서 상대의 태도도 변하게 되고 이렇게 편하게 있어도 부끄럽지 않고 밖에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얘만큼은 내 편이 되어줄 거란 그런 믿음 같은 거!”
이어서 봉수가 말했다.
“난 사랑은 촛불 같다고 생각해 왜냐면 촛불은 보고 있으면 참 예쁘고 신기하거든 근데 불을 잡으려고 하면 자꾸 손에서 빠져나가고 말아 그래서 본체를 잡으려고 하면 너무 뜨거워서 손에서 금방 놓치게 돼. 그러면 내 눈에 보이는 예쁜 촛불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몸을 펼쳐 방풍 시스템이 되어주는 거야. 굳이 잡으려는 욕심에 손에 쥐려고 하면 놓쳐버릴 수밖에 없는 바보 같은 짓이니까.”
봉수와 그의 여자 친구의 생각은 서로 달랐다. 그럼에도 본인들이 추구하는 방식으로 상대에게 바라지 않고 해 줄 수 있는 것을 각자 해주고 있는 듯 보였다. 생각이 더 많아졌다. 친구들도 사랑을 처음부터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도 과정 안에 있다. 어쩌면 이 생이 끝날 때까지 ‘사랑’이라는 정의를 내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겼다. 조금은 무서워졌다. 남들은 다 행복해 보이는 사랑을 하는데 나만 혼자 헤매고 나를 만나는 여성들에게도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심각하게 고민하는 나의 표정을 본 봉수는 어깨를 토닥거리며 위로해 주었다. 나에게도 분명히 진정한 사랑을 알게 해 줄 사람이 나타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커플이 말하는 사랑의 정의와는 다른 나만의 정의가 생겨날 거라며 위로했다. 생각보다 그 한마디가 퍽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작게나마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봉수의 말처럼 아직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믿을 참이었다. 종교도 없는 나는 운명을 믿었고 낭만을 믿었다. 미지의 그 어떤 신에게 운명의 상대를 어서 눈앞에 데려와 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고민을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봉수와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성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기회여서 좋은 시간이었다. 왜 그렇게 둘이서 매일 티격태격하며 싸우다가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붙어있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됐다. 봉수는 여자 친구를 대할 때 의도대로 되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행동에 존중을 해주고 봉수의 여자 친구도 봉수를 대할 때 그런 태도를 배우고 배려하여 큰 문제를 만들어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서로의 불가침 영역에 대해서 절대 침범하지 않기에 겉으로는 잠시 싸우는 것처럼 보여도 그 모든 행동이 믿음에 기반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다.
결국 사랑은 정리해본다면 믿음을 바탕으로 존중과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은 의식적, 의도적이 아니라 진심이 녹아있는 무의식과 평소의 습관,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 본들 잠시동안은 얻어낼지 모르지만 장기적인 사랑을 함께할 동반자를 위한 태도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절대적으로 '척'하는 사람과 배려가 습관처럼 몸에 배어있는 사람과는 처음엔 구분하기 어렵지만 시간이 갈수록 본모습이 나타나게 되면서 본모습을 점차 알게 된다. 물론 사람을 이분법적인 사고로 나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다양한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들이기도 하고 또 다른 문화나 시각과 수많은 생각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단 두 가지 인간만 존재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봉수 커플의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던 나는 여느 때와 비슷하지만 다른 다짐을 했다. 다음 사람을 만나면 마음을 닫아두기보다 활짝 열어서 다 보여주고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과거에는 나를 방어하느라 바빠서 관계에 필요한 이야기들 이외에는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하지 않으려 했다. 나의 아픔은 내가 가져가야지 같이 나눠지자고 하기에는 책임감이 없는 사람처럼 느꼈었다. 하지만 봉수 커플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상대가 나를 믿지 못했던 이유는 내가 상대를 온전히 믿지 못했고 그 원인은 마음을 닫아두고 한정적인 모습만을 이용해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노력했던 탓이었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정육면체의 성격을 가졌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주 자세히 보더라도 2개 혹은 3개의 면이다. 눈에 보이는 면들만 보고 상대의 모든 면이라 판단하고 착각한다. 나도 그랬지만 상대도 그랬을 것이다.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고 상대의 모든 것을 봤다는 착각이 문제를 불러일으켜 해결하지 못하면 점점 커져 스노볼이 되어 결국에는 사랑을 파탄 나게 만들었다.
봉수 커플 덕분에 출제 의도를 파악했으니 적절한 피드백으로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시켜 나가는지가 중요했다. 지금 마음이야 당연히 모든 마음을 열고 다 보여줄 자신이 있지만 새로운 사람이 생겨나면 간사한 나의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모를 일이기에 대책이 시급했다.
마침내 내가 찾은 방법은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 결국에 배움을 실천하는 과정은 내가 나를 믿고 초심을 잃지 않으며 다짐했던 강한 마음으로 대화를 통해 느꼈던 단점들을 보완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실전 경험이 필요했다. 나를 위한 자기애가 필요한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다른 사람과 세상을 더 아름답게 보고 즐기며 살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내가 원한다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나타날 리 만무했다. 하지만 매일 잊지 않으려 아침에 일어날 때와 밤에 잠에 들 때 항상 복기했다.
‘단면만 보고 판단하지 않기, 마음 활짝 열기, 진심으로 믿어주기, 배려하기, 존중하기’
학교 다닐 때도 해보지 않은 암기를 나이 30이 다 돼서 하고 있자니 웃음도 나왔다. 그래도 내게 다음에 나타날 나의 사람에게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 추운 겨울을 지나 어느덧 무더운 여름날이 오고 무더위를 나기 위해 보양을 한다는 초복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