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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난 만남

1부.

by 도심 Feb 09. 2025

침대 위에 곤히 잠들어 있는 여자는 다름 아닌 내 전 여자 친구 다빈이었다. 어떤 이유에서 다빈이가 여기에 있는지 얼추 짐작은 가능했다. 봉수는 유치원 시절부터 같이 놀던 동네 친구였다. 서로가 만난 여자 친구가 몇 명인지 알았고 심지어 가족의 수저 개수까지 알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친구였다. 그렇다 보니 서로 있는 얘기 없는 얘기를 모두 하며 여자 친구가 생기면 소개도 시켜주고 커플끼리 더블데이트를 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친했기에 작년 7월부터 사귀다가 올해 1월에 헤어졌던 다빈이 얘기를 가장 많이 했다. 

다빈이의 외적인 모습은 나의 이상형에 가까웠다. 검은색 긴 머리에 피부가 하얗고 키가 160이 되지 않는 아담한 키에 통통한 체형의 동물로 치자면 다람쥐 같은 스타일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헤어지는데 특별한 이유가 없듯이 헤어진 것은 아쉽지 않았으나 내 생각에는 다빈이와 속궁합 측면에서는 좋았다고 느꼈었고 그걸 봉수에게는 가감 없이 모두 이야기했었다. 어제도 술을 마시면서 다빈이 얘기가 나왔었나 보다. 그러니 술에 취한 사이에 봉수가 다빈이를 불러내서 지금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흐뭇해하며 웃고 있을 봉수를 생각하니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그도 더 그럴 것이 내가 아무리 인간쓰레기라고 하더라도 상도덕이 있는데 지금 나는 겨우 2달 사귄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봉수 이 녀석은 지금 여자 친구가 아닌 전 여자 친구를 불러내 이 자리에 있게 만들 다니 참을 수 없었다. 온몸이 부들거려 당장 봉수를 처단하려는 마음을 먹고 방을 빠져나가려 할 때였다.


“오빠.. 깼어?..”

“어.. 엉... 자.. 잘 잤어..?”

“응.. 근데 어디 가게?”

“어.... 화.. 화장실..”


그야말로 낭패였다. 기억이 나지 않는 척 몰래 빠져나가서 하나의 해프닝으로 마무리하고 봉수를 혼내주려고 했는데 다빈이가 눈을 떴다. 미친척하고 남아있는 술을 다 마셔버리고 기억이 나지 않는 척해야 하는 건 아닌지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도무지 제정신에 다빈이를 마주하기가 어색하고 불편했다. 밖으로 나가려던 발걸음을 다빈이가 깨는 바람에 화장실로 갔다가 나왔는데 다빈이도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서로 숨 막히는 어색한 공기가 방 안을 채웠다. 침대의 끝부분에 등을 돌리고 앉아 핸드폰만 바라보았다. 1분 1초가 굉장히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이 느껴졌다. 긴 침묵 끝에 다빈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 갈까..?”

“그.. 그래..”


우리 둘은 쭈뼛쭈뼛 걸어 나와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엘리베이터에서도 나는 문 앞에 다빈은 안쪽 구석에 서로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서 있었다. 1층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밖으로 나와 다시 서로 우물쭈물거리고 있다가 이번에도 다빈이 먼저 인사를 했다.


“잘.. 가..!”

“응.. 너도..”


짧은 인사 후에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려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봉수 녀석을 이번에야말로 용서치 않을 참이었다. 발걸음은 분노에 가득 차 더 빨라졌다. 택시를 타고 집 근처에 도착해 내려보니 저 멀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봉수였다. 나는 입에서 갖은 욕설과 사자후를 발사하며 마치 우사인 볼트가 빙의한 듯 빠르게 달려갔다. 내가 달려오든 말든 봉수는 담배를 피우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고만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달려 얼굴에 펀치를 날려주고 싶었으나 막상 봉수의 얼굴을 보니 긴장도 풀리고 웃음이 났다.


“하... 새끼 거 참..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냐고!”

“표정 보니 좋았구먼 이 형님이 너한테 은혜를 베풀었잖냐?”


은혜라는 단어를 듣고 참지 못해 헤드록을 시전 했다. 봉수는 아파하면서도 웃었다. 우리는 미친 사람들 같았다. 진정하고 어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가관이었다. 술에 취한 나는 말하는 모든 문장마다 다빈이를 찾았다고 한다. 그때가 좋았다며, 지금 여자 친구에 비하면 진짜 좋았다며, 왜 놓쳤을까 라며 후회 아닌 후회를 쏟아냈다고 한다. 지금 여자 친구가 듣는다면 따귀 100대를 맞아도 시원치 않을 망발이었다. 푸념을 쏟아내는 나를 보던 봉수는 문득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사자인 다빈이를 불렀고 다빈이도 처음엔 거절했으나 봉수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마지못해 나오게 되었다고 했다. 다음 상황이 더 가관이었다. 다빈이를 발견하자마자 옆자리에 앉혀두고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면서 신세 한탄을 했다고 한다. 만난 여자 중에 너를 가장 사랑했다는 둥 하루도 안 빼고 너를 생각했다는 둥 말이 되지도 않는 이야기들을 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봉수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믿지 않자 증거라며 핸드폰을 꺼내더니 동영상을 재생하여 눈앞에 들이밀었다. 동영상 속의 나는 봉수가 말한 그대로였다. 다빈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내 얘기를 들으며 한 손은 잡혀있고 남은 한 손으로 나의 등을 토닥여 주고 있었다. 


“와.. 나 진짜 미친놈인가?”


입에서 마음의 소리가 밖으로 나왔다. 봉수는 옆에서 계속 낄낄대며 웃었다. 못해도 10년짜리 놀림감은 족히 될 것 같이 보였다. 봉수 역시 내 성향을 잘 알기에 믿지 않겠다고 생각해 미리 영상을 촬영했다고 했다. 30초짜리 짧은 영상이었지만 임팩트가 너무 컸다. 어제 마신 술이 다시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은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봉수는 지금의 내 여자 친구에게는 평생 비밀로 해주겠다고 했다. 대신 봉수가 원할 때 치킨을 사다가 봉수의 앞에 갖다 바쳐야만 했다.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기억나지도 않는 어제 취중 진담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 친구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는 내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사람이었다. 다빈이와 헤어지고 힘들 때 모임에서 처음 만났고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주려고 하는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여자 친구를 두고 전 여자 친구와 하룻밤을 보낸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쓰레기가 맞는 것 같았다. 계속 웃으며 놀리는 봉수를 뒤로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발버둥을 쳤다. 죄책감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몸부림을 치다 말고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을 켰다. 여자 친구와의 어제 마지막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 봉수랑 술 마시고 들어갈게 연락 안 돼도 그러려니 해’

‘응.. 적당히 마시고 조심히 들어가!’


정신이 있을 때 연락을 해주고 그 뒤로는 연락을 해주지 않았다. 당연히 그랬겠지. 다빈이의 손을 붙잡고 하소연하고 있었으니 연락할 정신이 있었을까. 나는 내 머리를 주먹으로 강하게 때렸다. 밀려오는 고통보다 이제 뭐라고 연락을 해줘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죄책감과 미안함이 동시에 몰려오니 더 그랬다. 그때 핸드폰 메시지 알림음이 들려왔다. 


‘오빠 일어났어?’


여자 친구였다. 밤새 연락을 기다렸을 텐데 아무렇지 않은 척 연락해주는 걸 보니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일단 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서서히 어제의 기억을 하나의 해프닝이라 여기고 잊으려 했다. 어렴풋하게 미안한 감정은 계속 있었다. 봉수가 비밀을 지켜준다면 어떤 사고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지금부터라도 여자 친구에게 더 다정하게 친절하게 대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주말에 여자 친구와 만나서 일상적인 데이트를 즐겼다. 맛있는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카페에 가서 이야기도 나누고 나의 차를 타고 근교의 호수의 산책용 데크를 걸었다. 그러다 무슨 일인지 기억도 안 날 사소한 문제로 트러블이 생겼고 말다툼을 하다가 화가 났다. 내가 어떤 말에도 져주려고 하지도 않고 이기적인 언행을 계속하면서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다. 내가 먼저 홧김에 이별을 선언했다. 여자 친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한참 나를 쏘아보다가 돌아서서 가버렸다. 이번이 4번째 연애였지만 끝은 늘 무섭게 닮아 있었다.


그저 외로움이 싫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연애가 처음에는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안될 것처럼’ 미치도록 열정을 불태워봐도 점차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익숙해졌고 다툼이 생겼고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는 상대방이 야속하게만 여겨지기도 했고 이기적인 입장을 내세우다 보면 어느새 나는 또 혼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 내 연애가 그렇지 뭐..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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