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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 Apr 16. 2023

내 뺨을 때린 건 니가 처음이야

로맨스를 향한 확증편향

'하다못해 뺨이라도 날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내 뺨을 때린 건 니가 처음이야. 라도 해야죠.'


로맨스를 어떻게 써야 하느냐에 대한 갑론을박 중에 한 동료가 한 말이었다.

첫눈에 반했다는 설정이 아니라면, 누가 먼저든 상대방을 좋아하게 된 계기나 호감을 갖게 된 인상적인 사건이라도 있어야 되지 않냐. 어영부영 같이 있다가 손등 몇 번 스쳤다고 이건 사랑이야. 라든가, 이제 막 걸음마 뗀 미취학 아동마냥 걸어가다 돌부리에 걸려 같이 넘어지고는 듀근듀근 이제부터 1일이야. 라든가, 드라마에서 자꾸 이러니까 사람들이 이상한 거 배우는 거 아니냐. 그거 솔직히 박보검 같은 애들이나 되는 거잖냐. 근데 박보검이면 그냥 첫눈에 반했다고 쓰는 게 사실상 현실적이지 않냐. 뭐 대충 이런 얘기들을 치열하게 하곤 한다.


현실은 이렇게 조명받으며 예쁘게 넘어지지도 않는다.


위의 사례를 들어 현실적으로 얘기하자면 손등이 스쳐서, 혹은 같이 넘어져서 뭐가 되는 관계면 그런 일 없어도 알아서 썸 타고 연애한다. 애초에 맘에 안 드는 상대면 손등 스치는 것도 싫고, 같이 넘어지는 건 더 싫다. 슬펐던 지난 경험을 얘기하자면, 과거 이별이 간당간당했던 여자와 길을 걷다가 빙판길에 나 혼자 자빠졌는데, 그때 날 쳐다보는 그녀의 표정이란. 쪽팔리고 한심하고 가지가지한다는 그 표정 속에 넘어진 나의 안위만 쏙 빼고 모든 경멸이 들어 있었다. 헤어질 때 되면 밥 먹는 모습도 꼴 보기 싫다더니. 혼자 넘어져도 이 정돈데 같이 넘어졌으면 어쩔 뻔.


드라마에서 손등이 스치거나 새끼손가락 간질간질하면서 콩닥콩닥 설레는 장면들은 대부분 이미 두 사람이 어느 정도 호감을 느낀 이후에 벌어진다. 클리셰네 어쩌네 해도 웬만큼 진도를 빼야 쓸 수 있는 장면인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는 사람 입장에선 손등 하나 스치기까지 작가가 나름 치밀하게 쌓아 올린 빌드업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인상적이거나 강렬하게 마음에 닿았던 대사, 장면만을 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명장면과 명대사는 기억해도 세세한 전개과정까지 다 기억하는 경우는 별로 없지 않은가. 이건 당연한 현상이다. 다만, 명장면만 학습해서 연애에 대입했다가 낭패를 본 지인들의 비난, 가령 로맨스라고 하지만 사실상 선남선녀 인싸들의 판타지 아니냐. 라든가. 드라마 때문에 여자들 눈만 높아졌다든가. 에라이 방송국 놈들이라든가. 이런 비난을 듣는 것은 다소 억울한 일이다.


우리는 목적성을 뚜렷하게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을 경계한다. 돈을 빌리기 위해 다가오는 사람, 나의 재량권(권력)을 이용하기 위해 다가오는 사람, 정보를 얻기 위해, 파벌을 형성하기 위해 등등 순수하게 나란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나 관심이 아니라 저변에 ‘다른 목적’을 깔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불순하다고,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이건 인간의 본능적인 방어 기제이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인데 이 ‘다른 목적’에 ‘사랑’을 대입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거 같다.

예를 들어 내가 가진 '다른 목적'이 돈인데 처음부터 친분도 없고 뭣도 없이 다가와 대뜸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그걸 빌려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니 난 돈을 얻기 위해서 그 사람과 친분을 먼저 쌓고, 신뢰를 얻어가며 그렇게 차곡차곡 관계를 발전시킬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상대방과 진심이 통해 정말로 친밀하고 소중한 관계가 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런 관계를 단단하게 밟아 나가야 비로소 처음의 목적이었던 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 그럼 내가 가진 ‘다른 목적’이 연애라면? 내가 친분도 없고 뭣도 없이 다가가 대뜸 오늘부터 1일 합시다. 하면 돌아올 피드백으로 '네.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어요.' vs '이거 보기 드문 미친 새끼 아냐?'

어느 쪽이 확률이 더 높을까? 이건 박보검이 와도 힘들 거다. 그러니 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상대방에게 다가가 친분도 쌓고 신뢰도 얻고 매력도 어필하는 과정을 탄탄하게 밟아나가야 하는 거다. 근데 젠장, 소개팅 나간 첫날 어쩌다 우연히 손등이 스쳤는데 상대방이 반응이 없다며 그녀의 감정을 분석하고 있는 널 어떡해야 하지? 그냥 아마존에서 손등 그려진 마우스 패드 같은 거 하나 사다줄까?


돈이 목적이든 사랑이 목적이든 결국 가장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관계다. 내가 호감이 있어도 상대는 아직 호감이 없을 수도 있고, 호감은 아니지만 한 번 더 만나볼 용의는 있을 수도 있고, 서로 호감이 있어도 성격상 굉장히 조심스러울 수도 있고 변수는 무궁무진하다. 상대를 알아보고 관계를 먼저 발전시킬 생각은 않고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앞머리 쓰담쓰담 해줘야징. 유튜브에서도 여자들이 좋아하는 자연스러운 스킨십 이랬어. 이런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하니, 이건 뭐 돈을 빌리기도 전에 돈 생기면 뭐 하지? 생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정작 돈 빌려줄 사람은 생각도 않고 있는데.


누군가를 보고 함께 연애를 하고 싶다고 느꼈다면 그 사람이 궁금해질 것이다. 뭐 하는 사람인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책을 좋아하는지, 영화를 좋아하는지. 혹 게임을 좋아하는지. 맘에 드는 상대가 가진 미지의 변수들을 하나씩 알아가는 것은 연애의 목적을 떠나 그 자체로 커다란 기쁨이자 즐거움이 아닐까. 그 과정에서 내가 꽤 괜찮고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가는 상대방의 모습을 보는 것도 커다란 희열이 될 것이다. 내가 서두르지 않고 상대방과 진솔하게 교류할 때 어느 순간 명장면은 도둑같이 찾아와 드라마보다 더 잊을 수 없는 달콤한 판타지를 수놓는다. 그렇게 우리는 비로소 박보검이 되고 전지현이 된다.

당신이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의 명장면이 어떤 전개와 과정을 통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좋다. 다만, 당신이 좋아하는 명장면이 영화를 틀자마자 시작하지 않았음은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형 말대로 그녀와 천천히 알아갔더니 엄청 친해져 버려서 좋아하는 남자 생겼다며 저한테 연애 상담을 하는데, 니가 하란 대로 했더니 남친 말고 베프 됐어요. 님 이거 어떻게 책임지실?'


...손등을 스쳐볼래..? 아님 어디 돌부리 많은 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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