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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 Apr 30. 2023

욕망이라 쓰고 꿈이라고 잘못 읽었을 때

스스로에게 가해진 가스라이팅

연극, 뮤지컬, 영화, 드라마 모든 장르를 통틀어 그간 오디션을 얼마나 봤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헤아릴 수 없다. 무대에 선 횟수만도 몇 천 번은 될 것이니 오디션을 본 횟수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경쟁하는 것을 즐기지 않고, 남들 앞에 나서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해본 게 오디션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연기를 그만두고 글을 쓰고 있는 요즘, 난 내가 참 맘 편하게 살고 있다는 자각을 종종 하게 되는데, 그러고 보니 배우로 살던 시절엔 늘 긴장상태로 지냈던 거 같다. 언제 어떤 장르의 오디션이 갑자기 툭 튀어나올지 모르고, 비슷한 날짜에 오디션들이 이것저것 겹치는 일도 많고, 어떤 오디션은 준비해야 할 게 많고, 비루한 인맥을 통해 영화 관계자를 만나게 되는 자리라도 생기면 갑자기 즉석에서 연기를 요청하는 경우를 (술집이나 카페에서 갑자기 연기를 보여달라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참 무례한 요구라고 생각하지만 무명 배우는 다가온 기회 앞에서 예의를 따지지 않는다.) 대비해야 하기도 하고, 이런 이유들로 인해 배우들은 대개 다양한 버전의 1분 정도 되는 자유연기를 늘 몸에 새겨 넣고 다닌다. 나 같은 경우에도 배꼽 주우러 다니게 만들겠다는 코믹 연기,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온 듯 매콤한 악역 연기, 콧물 없인 볼 수 없는 절절한 눈물 연기, 이럴 때 왕 해보지 언제 해보나 싶은 사극 연기, 고향이 한 3군데쯤 되어 보이는 출신 지역이 수상한 사투리 연기 등 5개의 자유연기를 언제 어디서든 요청하는 즉시 바로 튀어나올 수 있게 연습해 놓고 6개월마다 새로운 대사로 업데이트하며 다녔다. 어떤 배우는 개인기랍시고 성대모사까지 준비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니 군대에서 툭 건들기만 해도 관등성명을 대는 이등병처럼 늘 긴장상태일 수밖에.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누군가 지금 연기를 시켰다는 시뮬레이션을 돌리면서 혼자 자유연기를 읊조리곤 했는데,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연기를 할 수 있는 천상 배우처럼 보이도록 나 자신을 가스라이팅 해왔던 것 같다. 이런 피곤한 삶에서 해방되었으니 내가 요즘 얼마나 편하겠는가.


위의 사례가 배우를 정신적으로 늘 긴장상태로 만드는 요인이라면 육체적으로도 긴장을 피할 수 없는 요인이 있는데 바로 다이어트, 체중관리다. 모든 배우들에게 100% 적용된다고 할 순 없지만, 또 배우 본인이 가진 캐릭터성이 비만형이라면 관리가 좀 느슨할 수도 있겠지만, 셀카나 영상을 많이 촬영해 보신 분들은 알 것이다. 살을 빼면 뺄수록 어쩔 수 없이 화면빨이 더 잘 받고, 카메라는 정말이지 거짓말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통은 단순하게 살 빼면 더 이쁘고 멋있게 나온다고 생각하겠지만, 배우나 감독의 눈으로 보면 앵글에 묻어 나오는 배우의 미세한 표정 연기에서 디테일이 확실히 달라진다. 살을 좀 빼고 얼굴의 음각이 잘 드러나야 조명도 잘 먹고 앵글에도 잘 묻고 연기의 표현이 더 잘 드러나는 것이다.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 하면서 이걸 깨닫게 되는 순간, 배우는 연기를 그만두지 않는 이상 다이어트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다이어트를 달고 사는 배우들은 종종 내 몸을 속여야 한다는 말을 하는데, 다이어트 자체를 숨 쉬는 것처럼 몸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게끔 길들이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비루한 몸이지만 나에게도 나름 식스팩을 탑재한 꽤 탄력을 자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난 사실 체중 변화가 별로 없는 지극히 보통의 체중이라 다른 배우들에 비해 그나마 관리가 쉬운 편이었고, 과거 뮤지컬을 하던 시절 4년 정도 발레를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발레는 몸의 성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체형을 정말 예쁘게 교정해 준다. 하지만 그만큼 극악한 연습 과정이 뒤따르기에 주변에 딱히 추천을 해주진 않는다. 그 시절의 난 대체 어떻게 4년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몸선도 예쁜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게도 자비 없는 다이어트의 기억이 있었으니, 처음으로 영화 단역에 캐스팅되었던 때였다.


단역이었음에도 속으로 쾌재를 불렀던 아주 흥미로운 배역이었는데 바로 ‘여장 남자’ 역할이었다. 마약에 찌들어 퇴폐적인 파티에 몸을 던지다가 결국 피를 토하고 죽는, 단역치고는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주는 역할이었다. 다만, ‘여장 남자’라는 캐릭터 특성이 있었고, 조연출이 내게 보낸 레퍼런스 영상을 보니 아주 많이 날씬한, 여자의 몸이라 착각할 수 있을 몸매를 요구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을 수도 (팬티만 입고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이런저런 요소들을 감안했을 때 당시 61kg였던 나는 대충 10kg 정도 감량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렇게 난 1달이란 시간을 잡고 50kg을 목표로 지옥의 다이어트에 돌입하게 되었다.


내가 첫 2주 동안 한 일은 그저 평소 먹던 밥량을 절반으로 줄인 것뿐이었다. 주변 배우들에게 다양한 조언을 들어본 결과, (그중엔 유사과학이라 칭해도 될 만큼 위험한 방법들도 참 많았다.) 무엇보다 위의 크기를 줄여 몸을 소식에 길들이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식사량을 반으로 줄이고 헬스장에서는 러닝과 복근 운동만 (다른 부위의 근육을 최소화시켜야 했기에) 하면서 2주를 보낸 나는 다음 단계로 식단 조절에 들어갔다. 미리 말해두지만 효과적인 식단은 인터넷에 많으니 그걸 참고하시라. 딱히 추천하진 않지만 그때 나의 식단은 삶은 계란 하나, 단호박 4분의 1개, 방울토마토 3개. 이렇게 하루 2번 식사였다. 러닝과 복근 운동은 아침에 1번, 저녁에 1번. 이렇게 하루 두 번씩.


운동 + 식단 조절의 효과는 굉장했고 체중은 하루하루 2~3kg씩 쭉쭉 빠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처음에 계획했던 한 달이 되기도 전, 3주 차에 난 이미 50kg에 도달해 버렸고 사실상 나머지 4주 차는 그냥 체중 유지기간이었다. 하지만 나의 정신상태는 뭐랄까. 해탈의 경지에 이른 스님들이 말씀하시던 무소유, 무욕의 경지가 이런 걸까. 모든 욕구가 0에 수렴했다. 식욕, 성욕, 수면욕뿐만 아니라 연기를 잘해보겠다는 욕심마저 희미해져 갔다. 난 주로 먹방을 틀어놓고 러닝을 했는데 맛깔스러운 음식들을 보며 굶주림에 대한 대리만족을 하는 게 아닌 음식들의 색깔이 예뻐서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음식을 디자인하는 직업이 따로 있다던데. 푸드 디자이너였던가. 그들이야 말로 진정 예술가였구나. 음식을 미술 작품처럼 감상하게 되는 진기한 경험이긴 했는데, 다이어트하는 데는 유리할지 모르겠지만 정신 건강으로 봤을 땐 이게 정상적인 증상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난 느꼈다. 위를 줄여 몸을 길들였더니 정신은 자연스레 가스라이팅이 되더라. 하지만 나중에 정신이 돌아왔을 때 비로소 깨달은 사실은 살을 빼는데 들인 시간에 비해 정작 연기 연습에 들였던 시간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배우로서 지냈던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난 나 자신한테 잘못된 방향으로 혹독했던 거 같다. 정도도 정도이지만 그 방향이 그랬다. 난 좋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내가 손을 뻗어 잡으려 했던 것은 관객에게 닿을 수 있는 좋은 연기를 하는 배우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누가 봐도 연기가 타고난 사람처럼 보이는 '천상 배우'였던 모양이다. 만약 내가 진짜 좋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면, 언제 어디서나 아무리 열악한 상황에서도 망설임 없이 연기를 할 수 있는 ‘천상 배우’로 보이기 위해 100번도 더 했던 닳고 닳은 자유연기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지하철에서 혼자 읊조릴 시간에, 내가 맡은 배역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을지, 더 다양한 인간을 표현할 수 있게 내 스펙트럼을 어떻게 넓힐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지 않았을까.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다이어트를 하는 순간에도 '여장 남자'라는 캐릭터를 열심히 찾아보고 나에게 적용시키는 시간들을 생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나 자신을 혹독하게 '천상 배우'로 가스라이팅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좋은 배우까진 아니더라도 좀 더 나은 배우가 되었으려나.


난 지금도 때때로 유명하고 돈도 많이 벌고 인정받는 작가가 되는 내 모습을 꿈꾼다. 욕망이 없는 사람은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기에 나의 이 속물근성을 미워하진 않는다. 다만, 순간순간 거울을 바라보기로 한다.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기를. 꿈과 욕망을 분별할 수 있는 여유를 잃지 않기를. 다시는 꿈을 빙자하고 욕망의 채찍질로 나 자신을 길들이기 않기를.




대충 이런 얘기를 했더니 여자친구가 굉장히 손해 본 얼굴로 볼록 튀어나온 내 올챙이배를 가리키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지금은 왜 이런 건데?’

‘요점이 그게 아니잖아.’

‘빨랑 다시 연기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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