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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 May 21. 2023

친구니까 천재가 아니어도 괜찮아

천재였음 친구가 되었을까

얼마 전에 작가님의 글은 드라마 부문 최종심까지 올랐으나 아쉽게 떨어졌다는 내용의 메일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아, 맞아. 올해 초에 공모를 하나 냈었지. 요즘 새로 쓰는 시리즈물이 있어 정신없이 쓰다 보니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불쑥 메일을 받아본 순간 아쉽기도 하고 그래도 최종심까지 올라갔다니 나름 위안이 되기도 하고 그런 다양한 감정이 들었다.


처음 상을 받았을 때가 글을 쓰기 시작하고 1년이 지난 후였다. 그땐 공모를 내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주변에서 일단 내고 보는 거라고 해서 이것도 경험이다 싶어 냈던 건데, 소 뒷걸음질 치다 개구리 잡은 거마냥 덜컥 수상을 하게 된 것이다. 영진위에서 주는 나름 유명한 상이라서 처음엔 얼떨떨 실감이 안 나다가 나중엔 40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재능과 이산가족 상봉한 듯, 기쁨이 엉엉 파도처럼 밀려왔다.


연기를 그만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딱 1년만 해보자. 1년 해보고 재능이 안 보이면 다 때려치우고 이제 예술 쪽은 거들떠도 안 보고 살아야지. 그렇게 시작했는데 상까지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 난 내가 천잰가 싶었다. 뭐야. 1년 만에 당선됐어? 미쳤네. 완전 불세출의 천재 작가잖아? 나 왜 이제 글썼어?

그 시기 나의 달뜬 기분은 당시에 썼던 다른 글들에도 고스란히 묻어있는데, 가끔 다시 읽어보면 오그라드는 것도 오그라드는 거지만 지금은 상상도 못 할 무리수들이 뻔뻔하고 아기자기하게 들어차있다. 자신감이 선을 넘어 자만으로 흑화 해 '이렇게 써도 나니깐 먹힐 거다' 라며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나의 이런 특이한 이력은 신인작가로서 가끔 자기소개서를 쓸 때 유용하다. 늦은 나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여자 작가가 태반인 이 바닥에서 (교육원 시절에도 여학생이 30명 정도면 남학생은 2~3명 정도다.) 존재 자체가 희귀한 남자 작가인데 1년 만에 영진위에서 상 받았다. 근데 글쓰기 전엔 배우였대. 이러니 관계자 입장에선 궁금해지는 거다. 이 사람 일단 만나나 보자. 실제로 면접 가면 대체로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하게 된다. 고작 경력 한 줄인데 요긴하게 먹히는 거다.


그래서 난 한동안 글쓰기를 아주 만만하게 봤다. 금방 입봉 해서 금방 김은숙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당시 당선됐던 글은 제작비 대비 기대수익이 불투명하다며 번번이 무산되었고, 난 쿨하게 또 쓰면 되지. 난 천재니까. 하고 새롭게 글을 써댔지만 공모에 줄줄이 낙방하면서 결국 내 한계를 실감하게 되었다. 이걸 뛰어넘지 못하면 딱 여기 까지겠구나. 재능은 어떤지 몰라도 확실한 건 난 천재는 아니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당차게 글을 시작했던 나는 이제 여느 글쓴이들처럼 하염없이 공모전에 문을 두드리며 도 닦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어쩐지 외롭지는 않다.

난 아침에 글을 쓰러 나가면 내가 오늘 또 어떤 새롭고 재밌는 장면을 쓰게 될까 기대한다. 내일 다시 보면 유치하고 노잼일 수도 있지만 그러다 보면 결국 주옥같은 장면이 하나 걸리게 마련이니, 난 마치 낚시꾼처럼 하루를 기대하며 글을 쓰러 간다.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글을 쓰면서 지내지만, 쓰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귀신같이 지나 하루가 저물어간다. 노을을 보다가 뭐야, 벌써 퇴근? 배고파. 투덜대며 짐을 싼다.


하루하루를 기대하며 시작할 수 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게 몰두하며 산다.

나는 이제 안다. 기대하고 설레어하며 매일을 시작하고 매 순간 몰두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당연한 삶의 디폴트값이 아니라는 것을. 물론 이 역시 공짜로 주어지는 행복은 아니지만.


재능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진 자리에 삶을 함께할 동무가 생겼다. 우리 1년만 사귀어볼까? 했던 글은 나에게 재능이나 무기가 아니라 친구가 되었다. 이것도 꽤 나쁘지 않다. 난 연기랑 결혼했어요. 난 글이랑 결혼했어요. 하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저기 근데, 가끔 실수로 천재여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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