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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 Jun 30. 2023

꿈이란 언제나 슬램덩크

인기남을 향한 슬램덩크

과거, 학생들의 방과 후 연극교실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난 때때로 아이들에게 묻는 질문이 있었는데 간단하고 흔한 질문이었다. 넌 꿈이 뭐냐고.

걔중에는 명확하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할 때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때가 많다. 그런 모습을 보면 늘 중딩 시절 내 모습이 떠오른다.


중딩 시절, 뭐 하나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던 나는 그저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이랑 말뚝박기나 하며 노는 평범한 개구쟁이 중에 하나였다. 그렇게 학교에선 남자애들이랑만 노는 조용한 아이였던 내가 학원에선 그 일상이 좀 달랐는데, 그 이유는 학원 여자애들이랑 같이 놀려면 그들의 문화를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지금은 카페라고 불리는 '커피숍'이 우후죽순 생겨 핫플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지금의 대중적 음료가 아아라면 당시엔 파르페였다.) 신당동 즉석떡볶이가 맛집의 대세였으며 노래방이 인싸들의 트렌드였으므로, 우리의 유흥은 즉석떡볶이를 먹고 커피숍에 갔다가 노래방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국룰이었다. 경우에 따라 중간에 커피숍은 생략 가능했지만 즉석떡볶이와 노래방은 절대 빠질 수 없는 코스였다. (당시 커피숍엔 테이블마다 전화기가 있어서 다른 테이블과 서로 전화연결이 가능했다. 자연히 커피숍은 헌팅의 메카가 되었기 때문에 이미 아는 이성과 커피숍에 가는 건.. 뭐랄까.. 커피숍 본연의 기획의도에 부합하지 않는달까. 가성비가 좀 떨어진달까. 그래서 커피숍은 주로 남자애들끼리, 여자애들끼리 오는 게 정석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노래방이란 곳에 가게 되면서 난 처음으로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하는 게 있다는 걸 알았다. 바로 노래였다. 


'와! 너 노래 잘한다!!'


사실 기가 막히게 잘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애들이 기가 막히게 못했을 뿐이다. 덕분에 난 살면서 처음으로 남들보다 잘한다는 칭찬을 언제나 미지의 존재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던 여자애들한테 몰아서 듣게 된 것이다. 이 거대하고도 신선한 충격을 받은 이후로 내 삶의 포커스는 온통 노래에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 시절 내가 얼마나 전략적이었냐면, 당시 유행하던 노래는 무조건 줄줄 외우고 있었는데 내가 소화 가능한 노래와 아닌 노래를 철저하게 분류하고 그중에서 특히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노래들을 선별해서 혼자 열심히 연습하고 다녔다. 세부적으로는 노래방에 가는 친구들의 스타일에 따라 1절만 부르는 집단이 있고 2절까지 다 부르는 집단이 있었는데 1절만 불렀을 때 효과가 좋은 노래가 있고, 2절까지 다 불러야 그 감동이 2배가 되는 노래가 있었기에 집단에 따라 노래를 분류해서 선곡하기도 했다. 또한 18번이라고 할 만큼 내가 잘 부를 수 있는 노래라면 그 노래는 무조건 2절까지 소화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왜냐면 1절만 부르는 집단이라도 내 노래에 순간적으로 맘을 뺏긴 여자애가 매우 감성적인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이 노래는 끝까지 들려주면 안 돼?'


라는 로맨틱한 요청을 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도 2절까지 감동 2배를 유지하며 부를 수 있는 곡이야말로 18번이라 칭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는 것이다. 

...쓰고 나니 좀 지독하긴 한데, 여자애들한테 인기 있고 싶었다.

결국, 그렇게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한 나는 급기야 엄마한테 충격 선언을 하고야 말았다.


'엄마, 나 고등학교 안 갈래.'


지금이야 퇴직하셨지만 학교 선생님이셨던 우리 엄마한텐 마른하늘에 이런 날벼락도 없었을 것이다. 아들놈이 공부 못하는 건 알았지만 고등학교를 안 간다는 건 찬성은커녕 상상하기도 어려운 문제니까.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잠시 바라보다가 왜 안 가는데? 물어보시는 엄마한테 난 당당하게 가수가 되겠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며 허비할 시간에 노래연습과 음악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애고 어른이고 사람이 뭐 하나 잘못 꽂히면 이렇듯 극단적이 되기 십상이다. 물론 나도 이것만으로는 절대 엄마를 설득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무슨 이유를 갖다 붙였어도 설득할 수 없었겠지만) 그래서 내가 꺼낸 이야기가 당시 국내 가요계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미치던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서태지의 음악은 음악적 장르도 그랬지만 그 가사 내용이 더 파격적이었는데 주로 대한민국의 교육제도에 대한 날 선 비판의식이었다. 대학을 위해 찍어내듯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제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서태지라는 가수의 지대한 영향력을 등에 업고 수많은 대중들과 동료 가수들을 동요시키던 상황이었다. 

왜 고등학교를 포기하면서까지 가수가 되고 싶냐고 물으시는 엄마한테 차마 여자애들한테 인기짱이 되고 싶다고. 여자애들한테 인기남이 되려면 가수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요! 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나는 서태지를 팔아 내 꿈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서태지처럼 썩어빠진 교육제도를 비판하고 음악으로 이 부당한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뮤지션이 되겠어요. (그러니 고등학교는 안 가겠습..)'


난 아직도 이때를 생각하면 이불이 공중에 떠있다. 그냥 여자애들한테 인기 많고 싶어서 가수 되겠다고 말하는 게 백배 천배 나았을 거다. 엄마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나의 이 어처구니없는 발언은 당연히 씨알도 안 먹혔고 난 닥치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난 어릴 때 정말 신박한 효놈이었던 거 같다. 우리 엄마 고생 참 많았다.


그랬다. 언제나 꿈을 꾸게 된 이유는 참으로 보잘것없고 하찮았다. 그래서 남들에게 왜 이런 꿈을 꾸게 되었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꿈의 이유를 그럴싸하게 포장하기 급급했다. 하지만 배우생활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꿈이란 언제나 그 시작이 하찮다는 것이다.

배우가 되었을 때, 난 그저 연기하는 게 재밌었다. 평소에 타인에게 화를 내거나 소리치거나 울거나 이런 감정을 표출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연기는 다르다. 내가 욕을 하든 화를 내든 울고불고 쌩난리를 쳐도 결국 연기란 대본에 의해 짜고 치는 고스톱이니까. 오히려 감정을 솔직하게 잘 표현하면 잘한다고 칭찬받는 게 연기니까. 난 현실에서 차마 표출할 수 없는 감정들을 연기와 무대 뒤에 숨어 맘껏 내지를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면 커튼콜 때 관객들의 박수를 받는 게 좋았고, 누가 와서 연기 좋았다 하면 날아갈 듯 기분 좋았다. 그게 다였다. 그것만으로도 연기를 할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 연기를 보고 위로와 행복을 받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내가 연기한 인물들을 통해 살면서 전혀 관심 없던 사람들을 헤아려보게 되면서, 그렇게 연기를 하기 전과 연기를 한 후의 나란 사람이 조금씩 달라지고 성숙해지면서, 비로소 꿈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꿈에 대해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꿈은 하면서 깊어진다는 것이다. 시작부터 거창한 꿈이란 있을 수 없다. 아직 해보지도 않았는데 깊어질 게 뭐란 말인가. 그건 음악을 해보지도 않고 음악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겠다는 내 거짓말처럼, 꿈꾸는 것조차 남의 인정을 갈구하는 애처로운 포장지일 뿐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직접 해보고 겪어보면서 처음엔 그저 재밌어서 해봤던 일이 하나둘씩 내 삶에 의미를 물어다 주는 것이다. 그렇게 꿈은 점점 소중해지고 깊어진다. 


슬램덩크라는 유명한 만화가 있다. 그 만화를 좋아할 이유는 많지만 나에겐 가장 중요한 지점이 있다.

강백호는 허구한 날 여자한테 차이기만 하는 키만 큰 싸움쟁이였다. 그런 강백호가 채소연이라는 여자한테 반하게 되고, 그 여자가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로 강백호에게 농구를 권한 것이 그의 농구 인생의 시작이었다. 채소연이 슬램덩크를 좋아한다기에 강백호는 다짜고짜 농구부에 가입해 슬램덩크를 꿈꾸며 농구를 시작한다. 기본적인 드리블도, 레이업도 안 되면서 오직 채소연에게 멋진 남자로 보이기 위해 슬램덩크를 하겠다며 설쳐대던 초짜는 조금씩 농구가 재밌어지고, 좋아지고, 농구로 인해 열정과 꿈이 생기고, 자신의 가치를 깨달아간다. 결국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산왕전에서 강백호는 화려한 슬램덩크가 아닌 평범한 2점 슛으로 자기 삶의 영광의 순간을 수놓는다. 슬램덩크라는 이름을 가진 만화는 진정한 바스켓맨이 된 강백호를 통해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위대한 2점 슛으로 막을 내렸다.


좋아하는 이유가 하찮다고 주저하지 말기를.

꿈이란 언제나, 슬램덩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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