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산이라 쓰고 방심이라 읽는다
주식 투자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ETF는 하나의 구원처럼 다가온다. 직접 기업을 분석하고 종목을 고르지 않아도 되고, 자동으로 분산 투자 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인다. 워렌 버핏조차 ‘평범한 투자자가 해야 할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칭송한 투자법이다. 이렇듯 ETF는 언제부턴가 '게으른 투자자의 가장 똑똑한 선택' 이라는 명찰을 달고 시장에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버핏이 강조한 ETF의 이점은 어디까지나 S&P500 같은 광범위한 시장 인덱스를 추종하는 ETF에 한정된 이야기다. 다시 말해, 장기적인 미국 경제의 성장에 묻어가는 전략으로서의 ETF 투자였다. 시장 전체를 사는 것이고, 특정 기업도, 특정 산업도 아닌 미국이라는 시스템 전체를 믿는 행위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투자할 수 있는 ETF 시장은 당시와는 전혀 다르다.
이제 ETF는 단순한 인덱스를 넘어, 개별 테마와 섹터, 심지어 개별 스타일과 가설까지 상품화해서 팔고 있다. 반도체, 2차전지, 로봇, AI, 여행, 우주, 리츠, 원자력, 고배당, 저변동성, 성장형, 가치형, ESG… 나열하다 보면 ETF가 아니라 쇼핑몰처럼 느껴진다. 투자자가 그럴듯한 키워드를 고르면 증권사는 맞춤형 ETF를 갖다 바친다. 마치 한 번에 테마주를 바구니째 사는 느낌이다. 개별 종목을 분석하는 수고로움을 줄여준 대신, 투자자는 손쉽게 '이 테마에 올라탈 것인가 아닌가'라는 단순한 선택만 남게 된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ETF는 본질적으로 ‘자동 분산 투자’라는 환상을 준다. 다수 종목을 담고 있으니 위험도 낮고, 방향성만 맞으면 수익도 따를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테마 ETF는 사실상 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이야기’를 종합해놓은 선물세트에 가깝다. 주도 섹터, 유망 업종, 관심 테마들이 빠르게 반영되지만, 그것은 곧 고평가 리스크와 내재적 거품을 수반한다. ETF라는 형식이 이를 감춰줄 뿐이다. 개별 테마주의 급등락을 직접 체감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그룹화하고, 상징화된 테마주를 투자하는 효과를 준다.
게다가 ETF는 투자의 책임과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특정 종목에 투자할 땐 그 기업을 조사하고, 적어도 이 회사가 무엇을 하고 앞으로 어디로 가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ETF를 매수하면, ‘이 시장은 괜찮겠지’라는 막연한 낙관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결과는 투자자 스스로의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올라가면 그냥 좋고, 떨어지면 ‘ETF니까 괜찮겠지’ 하며 근거 없는 합리화를 하게 된다.
특히 요즘처럼 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돈이 빠르게 움직이는 시대엔 테마 ETF의 수명도 매우 짧다. 유행하는 테마는 빠르게 ETF로 상품화되고, 빠르게 가격에 반영된다. 그 후에는 뒤늦게 올라탄 투자자들이 떠안아야 할 리스크만 커진다. ETF는 리밸런싱이라는 이름 아래 조용히 종목을 바꾸고, 구조를 변경한다. 투자자는 여전히 같은 코드의 ETF를 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안의 내용물은 이미 달라져 있을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역설적이게도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alienation)’ 개념과 맞닿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결과물과 분리되고, 삶에서 의미를 잃는다. 노동은 인간의 자기실현이어야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는 오히려 타인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제네시스' 자동차와 '래미안' 아파트로부터 철저히 외면된다는 의미다. 현대의 ETF 투자자 역시 자본주의의 가장 발전된 도구를 이용하면서도, 그 자본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회적 영향을 주는지 알지 못한 채 철저히 소외된다. 그는 자본의 주인이 아니라, 그저 펀드에 돈을 입금하는 시스템의 부속품일 뿐이다.
그가 소유한 것은 주식이 아니라 지수의 파편이다. 이 파편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거래되고, 그 누구도 그 실체를 깊이 알지 못한다. 이로 인해 투자자는 기업의 윤리, 실체, 방향, 혹은 사회적 책임에 대해 관여하지 않고, 관여할 수도 없다. 그는 더 이상 자본의 주인이 아니라, 자본 구조의 자동화된 톱니바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테마주 광풍에 묵묵히 돈을 입금하는, 영혼없는 투자자를 찾는 ETF에 우리가 비판적인 관점을 가져야 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