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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생활자 Mar 25. 2020

L의 이야기

그때 그렇게 보내는 게 맞았는지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니, 그 번호는 없어져 버렸다. 이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 써도 되는지 좀처럼 판단이 서지 않았다. 여전히 판단은 서지 않지만, 나는 그 판단을 미룬 채 이 이야기를 써보기로 한다.


갑작스러운 카톡이었다. 스카이프로 화상면접을 보기로 했는데, 스카이프 연결이 제대로 됐는지 내가 확인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몇 년만의 연락에 당황스러웠지만, 과히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기에 스카이프 어플을 깔고 확인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이어진 얘기는 셰어하우스에 살고 있는데, 셰어하우스 주인이 이상하다는 얘기였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넋두리라니 이 또한 당황스러웠지만, ‘어머, 그 사람 정말 이상하다.’며 기본적인 너스레를 떨었다. 여자들끼리 가볍게 오가는 인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 전화는 한번 더 이어졌다. 셰어하우스 주인이 당장 나가지 않으면 법적인 조치를 하겠다며 이사를 강요한다는 내용이었다. L에게 들은 자초지종은 가벼웠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 분명 다른 사연이 있겠지.


L은 대학시절, 선교여행을 함께 했던 1살 연하의 동생이다. 사는 동네가 같아 조금 더 친해지게 되었다. 이후 모회사가 같은 회사생활을 겪으면서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종종 안부를 물으며 지냈고, L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조문을 갔었다. 그리고 L은 회사를 그만두고 아주 긴 여행을 떠났다.


우연히 나의 출장기간과 L의 여행지가 겹쳤다. B지역에서 출장 중간에 L을 만났다. 그리고 느꼈다. 내가 알던 L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호텔에서 문제가 있었는데, 그럴 땐 제대로 따져야 한다며, 가감 없는 충고와 비판을 퍼붓는 그녀에게 나는 제대로 녹아웃 당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얼굴은 같은데, 분명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를 한참 뒤에 만났을 때, 나는 L에게 한번 더 녹아웃 당했다. 다시는 L을 만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안타깝지만, 그녀의 변화를 인정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 걸려온 전화였다. 다시 한번 더 녹아웃을 당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느껴졌다. 벼랑 끝에 서 있는 L이 말이다. ‘지낼 곳이 없으면 우리 집에서 지내.’ 그리고 L은 우리 집으로 왔다.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는, 28평 밖에 되지 않는 우리 집으로 말이다. 그리고 25일을 지냈다.


처음 말했던 1주일이 2주일이 되는 것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3주일이 되자 버거웠다. L에게 이 이상 길어지는 것은 어려움을 얘기했다. 손님방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라서, 나의 아이는 자기 방을 제대로 드나들지 못하고 지낸 지 오래였다. 밤마다 잠들지 못하고 TV를 보는 L로 인해 남편은 밤에 화장실을 편히 가지 못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L은 월세를 낼 테니, 좀 더 지낼 수 없겠느냐고 제안했다. 여러 이유를 들어 제안을 거절했다. 또 다른 셰어하우스를 구한 L은 며칠 후 우리 집을 나갔다. 집을 나가기 전 보여주었던 L의 이상한 행동들이 잊히지 않는다. 계속해서 생각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그리고 두 달쯤 지나서 온 카톡이었다. ‘언니, 잘 지내?’ 공항에서 돌아오는 차를 운전하며 답장을 보류했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에 가까웠다. ‘잘 지내지. 너는 어때?’라며 다음날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답장은 없었다.


한 달쯤 후, 그때 그 카톡창을 다시 확인했다. 안 읽음의 1 표시가 선명했다. 가슴이 떨려서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함께 선교여행을 했던 지인에게 L의 소식을 물었지만, 그녀 또한 우리 집에서 지냈던 시점 이후로 L의 이야기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L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


굉장히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이다. 나에게 L의 이야기는 말이다. 계속해서 생각한다. 그때 L을 그렇게 보내는 게 맞았냐고. 더 적극적으로 L을 도왔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그리고 또 생각한다. 부디 살아있어 달라고.





이 글을 L이 본다면,

꼭 살아있다고 연락해주길 바랍니다.

당신의 안부를 묻는 것이 나에게 너무 절실한 일이라,

염치 불고하고 그때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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