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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생활자 Jun 25. 2020

식물과 나 둘만의 시간, 보테니컬 아트

얼마 전부터 보테니컬 아트를 배우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디자인 전공자예요. 잘하지는 못했지만, 1년 좀 넘게 입시 학원에서 연필 소묘도 배웠습니다. 예중, 예고를 나왔던 동기들에 비해, 미술 실기 능력이 항상 부족하다 느꼈던 터라 지금 배우는 보테니컬 아트 수업시간에는 전공자인 걸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원래 꼭 디자인을 해야지 하고 생각했던 적은 없어요. 그림이 좋은데 화가가 되면 또 가난해질 것 같으니까, 회사에 들어갈 수 있게 디자인을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디자인은 그림과는 또 달라서 회사생활은 오래 하지 않았어요. 회사를 나오고 그림을 더 그리고 싶어서 일러스트 학원도 6개월 정도 다니고, 서양화를 전공한 같은 동네 후배에게 아크릴화와 유화도 개인적으로 배웠어요. 퇴직 후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어린이 미술 강사를 2년 정도 했는데, 그것도 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한 때는 그림을 그리는 동화작가도 꿈꿨던 적이 있는데, 그림을 그리는 게 재밌기보다는 너무 고통스럽기도 해서 그림 작가의 꿈은 접어놓았답니다. 내 안의 무언가를 그림으로 꺼내놓아야 하는데, 필력도 안 되는 사람이 그 걸 막 꺼내려고 하니까 힘들더라고요. 지금은 저에게 그림은 글쓰기 다음의 취미가 되었어요.


보테니컬 아트는 예전부터 무척 배워보고 싶었어요. 개인적으로 창의적인 작업을 힘들어하는 타입이라서 주어진 사물을 그대로 그리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보테니컬 아트는 꽃이나 풀, 나무, 열매 등의 자연물들을 실물로 보며 그리거나, 사진을 보면서 그리는 작업이에요. 그리고 색연필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서 초보자들도 접근하기 쉽다는 게 큰 장점입니다. 저도 또한 색연필을 쓰는 것에 매력을 느꼈어요.



첫날 수업은 선 긋기로 리본 표현하기였어요. '색연필로 색깔만 찾아 바로 툭툭 그리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선 긋기부터 쉽지가 않습니다. 소묘를 배운 것이 큰 도움이 됐어요. 옅은 색부터 한 톤, 한 톤 부지런히 올리고 또 올려서 그 위에 짙은 색을 올려야만 풍부한 색감의 그림이 됩니다. 빨리빨리 배워서 그리고 싶었는데, 절대 빨리 그려지지 않는 그림입니다.  


같이 수업을 듣는 분들은 모두 부모님 또래의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십니다. 제가 사는 지역은 새소리만 나는 시골이라서 낮에는 젊은이를 보기가 어려워요. 마을 공동체에서 하는 이런 수업들은 시골마을을 지원하는 국가사업의 일환입니다. 3개월에 3~5만 원으로 수준 높은 강사님들의 수업을 들어요. 저는 작년에 들었던 정원 가꾸기 수업에 이어 성인 영어 수업, 지금은 보테니컬 아트를 듣고 있네요.


성격이 급해서 끝까지 집요하게 식물의 세밀함을 파고들어야 하는 보테니컬 아트는 쉽지 않습니다. 이번 주에는 작약의 나뭇잎을 그리는 숙제가 있었는데, 나뭇잎의 잎맥을 따라가다가 결국, 성질 급한 저는 여러 개의 얇은 잎맥은 몰래 생략해 버리고 말았지요. 하지만, 함께 그림을 그리는 어르신들은 그 걸 끝까지 해냅니다. 그분들의 성실함은 저의 수년간의 그림 공부를 능히 능가합니다. 타인의 그림을 보는 것이, 제 그림만 그리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깨달음을 줍니다.



화려한 꽃보다 투박한 열매가 주는 매력도 알아갑니다. 자연에 늘어진 솔방울도, 한쪽이 벌레 먹은 나뭇잎도, 모두 하나의 피사체가 됩니다. 보테니컬 아트의 매력은 이런 뜻밖의 자연물과의 만남입니다. 어제 그렸던 작약의 나뭇잎이 가지 위로 뻗어나가기 위해 얼마나 온 힘을 다해 가지의 틈을 밀어냈는지, 나뭇잎 끝의 빨간 부분을 보며 느낍니다. 그 힘들고 애씀이 다 색 위에 입혀져 있습니다. 잎사귀 하나를 펼치기 위해, 온몸으로 햇빛을 받아 낸 흔적이 나뭇잎의 뾰족한 틈새에서 느껴집니다. 장하고 장합니다. 그렇게 경이로운 자연의 섬세함을 그림에 담아냅니다.


사실 어깨가 아파요. 디자인을 하면서 어깨를 많이 혹사시켰습니다. 20대부터 어깨는 제 고질병이 되었어요. 그래서 오랜 시간 색연필을 잡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 저에게 선생님은 수채화로도 보테니컬 아트를 할 수 있다며, 다른 수업도 더 들으라고 하십니다. 몸 둘 바 모르며, 고민하는 시간입니다. 그 애정이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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