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뽀득해지고 싶어서 목욕탕으로 향했다. 단골 목욕탕은 내가 기어 다닐 때부터 다녔던 곳이다. 낮 시간대에 오면 많은 단골손님(주인 포함)이 날 알아봐서 일부러 늦은 오후에 갔다. 아르키메데스 마냥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문제가 있다면 난 탕에 오래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사색은커녕 머리에 피가 몰려서 나갈까? 말까? 만 반복했다. 간신히 15분을 참고 내 자리에 멍하니 오분을 앉아있었다. 몸을 식힐까 하며 냉탕으로 향했지만 발끝만 담그고 도망 나왔다. 어린이 시절엔 풍덩풍덩 잘 들어갔던 것 같은데. 결국 내가 향한 곳은 가장 하급(?) 탕. 그마저도 온몸을 푹 담그진 못하고 발만 담갔다. 그제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떠오른 생각은 내가 있는 목욕탕에 관해서였다. 20대 중반인 내가 기어 다닐 때부터 다녔으니, 연식이 충분히 짐작되리라. 그래서인지 8월이 되면 주인이 바뀐다고 한다. 소식을 전해준 건 외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이곳의 왕할머니나 다름없고, 할머니가 할머니인 시절 내내 길어도 주에 한 번은 이곳에 방문했으니 할머니가 느낄 아쉬움을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주인이 바뀐 목욕탕은 이전의 목욕탕이 아니리라. 내가 추억하던 식혜의 맛과 오늘 먹은 식혜의 맛이 다른 것처럼.
식혜의 맛하니 어릴 땐 목욕할 때 먹는 식혜와 목욕한 다음 먹는 팬돌이(파란색!!)만큼 맛있는 게 없었다. 내가 어릴 땐 식혜를 통이 아닌 대접에 주었는데, 살얼음을 푹푹 퍼먹는 재미가 있었다. 온탕에 몸을 담그고 식혜를 퍼먹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좋았다. 그 시간이 좋아서 할머니를 따라 목욕탕에 자주 갔는 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비록 때를 미는 순간은 아프고 힘들었어도, 할머니랑 쌓은 추억이 방울방울 하니까.
할머니는 2n살……168cm에 100kg에 육박하는 내 몸의 때를 아직도 벗겨주려고 하신다. 당신의 뜻을 차마 거스를 순 없어서 등까지만 내어드린다. 할머니! 다른 사람이 보면 천하의 불효나 다름없다니까요! 그렇게 외치는 나와 달리 근처에 앉은 단골 아주머니들은 '할머니가 아직 네가 애 같은가 보다~할머니 하잔대로 해~'라며 할머니를 두둔하신다. 내가 왜 늦은 오후에 방문했는지 알 수 있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어린 내가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 백수가 되었다. 이곳을 기어 다니던 나는 걷기 시작하고 뛰기 시작하고, 마침내 혼자 살게 되었다. 할머니가 느낄 아쉬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아쉽다. 이제 어떤 곳이 나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현재를 기억해 줄까. 내 또래 대부분에게 그런 공간은 없어진 지 오래일 것이다. 나에겐 두 군데, 목욕탕과 할머니 집이 남았다. 하지만 8월이 지나면 목욕탕은 내 추억에만 자리한다. 할머니 집만이 굳건하게 나의 0살부터 2n살인 지금까지의 나이테를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노원을 떠날 수 없는 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집이 할머니집인 이상 나는 노원을 떠나지 못한다.
발을 담그고 있자니 몸이 시려, 다시 탕에 들어가길 도전했다. 이번엔 뜨겁다 말고 다른 생각이 든다. 이 목욕탕에 온 게 얼마만이더라. 목욕탕에 올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쁜 건 아니었다. 내가 다닌 회사는 워라밸을 지켰고, 휴일도 보장됐으니. 단지 내 마음이 바빠 이곳에 올 수 없었다. 몸을 담근 그제야 정말, 진심으로 나 자신에게 수고했다는 말이 나왔다. 성인이 된 이후로 쉬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든 집을 떠나야 했고 나 자신을 먹여 살려야 했다. 누군가의 딸이자 아무개 사원. 두 역할을 모두 벗어던지자 드디어 안정이 찾아왔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해내는 하루는 즐겁다. 소득은 없지만, 한동안은 실업급여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요즘의 나는 알코올도, 우울증 약도 필요 없을 정도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디지털 기기에 둘러싸인 삶에선 안정됨을 자각할 수 없었다. 모든 디지털 기기와 소통에서 떠나 혼자 목욕탕에 덩그러니 놓이니 깨달았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오늘 목욕 시간은 할 일을 다했다.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하다면, 목욕탕에 가보자.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놓게 됨과 동시에 아르키메데스가 될 기회를 잡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