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thinking cloud Oct 23. 2021
앞서도 언급했지만 원룸촌은 공사가 끊이지 않는다. 한 빌라의 신축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빌라가 리모델링을 시작한다. 공사가 수건이니? 뺑뺑 돌아가며 수건 돌리기 하게?나는 볼멘소리로 끝나지만 누군가한테는 삶의 터전이 없어지는 큰일이었다.
발렌타인에 살 때 앞 건물에 세탁소가 있었다. 내가 이사 오기 십오년 전부터 있었던 세탁소였다. 머리가 하얗게 센 아저씨 사장님께서 십.오.년을 말하던 톤이 강렬했다. 평소에는 빼곡히 매달린 세탁물의 영향으로 가게가 어두컴컴했는데, 어느 날 그 세탁소 벽이 전에 없이 알록달록했다. 걸음을 멈추고 그 정체를 살펴보았다.
<그동안 본 세탁소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민 여러분께서 많은 사랑 주신 덕분에 십육년이나 이 자리에서 세탁소를 할 수 있었습니다만, 부득이 가게 영업을 종료하게 되었습니다. 12월 말일까지 맡겨두신 세탁물을 찾아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2월 말일 이후 찾아가지 않은 세탁물은 임의 처분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저희 세탁소를 이용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늘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희망세탁클리닉 주인 올림>
그 커다란 편지는 일부러 돈을 들여 캘리그래피 업체에 부탁한 듯 보였다. 편지 원문을 쓰는 일이나 제작해서 붙이는 일을 거치는 동안 세탁소 사장님의 마음이 어땠을까. 이 공들인 편지로 사장님이 세탁소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조금 짐작이 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영업기간에 막연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맡겨놓은 옷이 없었던 터라 들어가서 이유를 묻지도 못하고, 사정을 알아보려고 문 닫는 집에 옷을 맡기러 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세탁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고, 곧 그 건물은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갔다.
한아름 할인마트는 내가 이틀에 한번 꼴로 과자를 사러 들르는 동네 마트였다. 어느 날부터 과자 칸이 비어도 채워놓지를 않길래 물어보니까 사장님이 이제 장사 그만한다고 했다. 반사적으로 왜요?라고 물어봤는데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사장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원해서 하는 폐업이 아니라고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딱히 무슨 말을 들은 것은 아니고 사정을 듣지도 못했는데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이상했지만 물어봐서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 할인마트는 장사 그만한다고 한다고 들은 지 삼일만에 문을 닫았다.
세탁소가 있던 자리는 네일샵이 되었고, 동네 할인마트가 있었던 곳은 세븐일레븐이 되었다. 없어진 가게의 사장님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어디에선가, 가능하면 다시는 없어지지 않을 곳에서 다시 세탁소와 마트를 하고 계시길 바란다.
리모델링은 건물의 수명을 늘리고 가치를 높여 월세를 많이 받기 위한 방법이다. 건물주는 리모델링을 하는 동안 세입자를 내보내야 하고 그 사이에는 월세 수입 없이 오히려 막대한 리모델링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그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진행하는 이유가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오래 다닌 가게가 없어질 때마다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단골가게와 나를 분리하지 않고 공생하고 있다 여기는 걸 새삼 자각한다.
몇 달 전에 원룸촌 가장자리 큰 도로가에 24시간 헬스장이 들어섰다. 나는 그 헬스장을 보자마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집 근처 희망 헬스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불과 100미터도 안 떨어진 거리의 새로운 헬스장에 손님을 빼앗겨 희망 헬스장이 타격을 받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든 것이다. 나도 몇 달 다녔던 곳이라 새로운 헬스장에 밀리지 말라고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지금 당장 이용권 끊을 것도 아니면서 오지랖이다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안 없어졌으면 좋겠다.
오늘도 늘 다니는 길을 걷는다. 네일숍은 알록달록 반짝이고, 세븐일레븐은 밝다. 하지만 나는 그 가게들에서 세탁소와 마트를 추억한다. 가게는 바뀌어도 추억은 안 바뀌고 그대로 있다. 가게와 공생하던 나는 이제 추억과 공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