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thinking cloud Oct 23. 2021
희망동 원룸촌만 정전된 날이 있었다. 해가 막 지기 시작한 때였다. 집에 혼자 앉아있었는데 천장의 불이 꺼지고 냉장고 돌아가던 소리가 멈췄다. 일순 세상이 고요했다. 평소에 전기로 인한 소음이 이렇게나 컸었나 새삼 인식했다.
내 방만 전기가 내려간 걸까. 아니면 옆 건물도? 정전의 원인을 밖에서 안으로 찾아들어오기로 했다. 다른 것보다 냉장고에 넣어둔 아이스크림이 문제였다. 큰마음먹고 서른한 가지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에서 하프갤런을 사둔걸 아직 얼마 먹지도 못했는데... 상황 파악도 필요하고 빛이라고는 휴대폰에서 나오는 것 밖에 없는 상태로 집안에 있기도 선뜩해졌다.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골목 전체가 깜깜했다. 불 켜진 방이 한 군데도 없었다. 옆골목도 그랬고 그 옆골목도 그랬다. 동네 전체의 정전이었다. 어릴 때 몇 번인가 정전을 경험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집에서 정전이 일어난 건 처음 봤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던 터라 스산하고 뒤에서 뭔가 확 덮칠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동시에 편안했다. 조용하고, 뭔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정전이 내 머릿속에서 돌아가던 모터도 잠깐 쉬게 하는 기분이었다. 그렇지. 만약 정전이 안되었다면 나는 휴대폰 동영상을 찾아보면서 밀린 빨래에 대한 걱정과 저녁에 운동을 하러 갈지 말지에 대해 고민하느라 머릿속 모터를 계속 돌리고 있었을 테니.
정전이 일어나니 텔레비전 대용이던 휴대폰의 역할이 달라졌다. 휴대폰을 가장 먼저 챙겼지만 여차할 때 비상연락 수단을 위해서였다. 배터리 닳는 동영상은 당장 끄고 뉴스를 봤다. 아직 정전에 대한 뉴스는 없었다.
어두운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있자니 각 빌라에서 한 명씩 두 명씩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집 밖으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 거였다. 하긴 자고 있던 게 아니라면 전기가 나갔는데 안 나와볼 사람이 없겠다 싶었다. 다들 집에서 입는 편한 옷차림이었다. 다 정전이라고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나보다 어려 보였고 모두 어리둥절했다. 내가 놀랐던 건 그 시간에 집에 있는 사람이 꽤 많구나 하는 것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산책이나 하기로 했다. 갑자기 불한당이 나타나 위협을 당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도 아늑함이 있었다. 한 걸음씩 나아갔다. 불이 꺼지니 비슷 규격의 원룸촌이 더 비슷비슷하게 보였다. 과장 좀 보태서 이러다가 집 못찾는 거 아닌가 우려될 정도로.
어둠 속을 산책하는 건 이전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더 깊은 밤에 나오는 것과는 달랐다. 지금보다 평소의 밤이 더 어둡지만, 가로등과 창문마다 나오는 불빛들이 있어 덜 외로운 기분이랄까.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면서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차에 들어가서 라이트를 켜는 사람도 있었고, 화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었다.
상가가 있는 길로 가봤다. 거기도 불이 나간 건 마찬가지였는데, 그래도 영업은 계속되고 있었다. 술집은 대부분 초를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집집마다 초를 켜고 영업하고 있었다. 언젠가 갔던 칵테일 바처럼 일부러 만들어낸 분위기 같기도 했다.
그 상가 골목에서 한집만 간판이 환하게 불이 들어와 밝았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태양광전지로 돌리는 간판이라고 했다. 오. 친환경 에너지가 어두워지면 존재감을 드러내는 낮달같았다.
큰길로 나갔다. 정전이 어디까지 일어난 것일까 궁금해서였다. 사고가 나면 사고의 규모를 파악하려는 버릇이 내게도 있다니. 큰길을 건너 내가 선망하는 아파트 쪽을 보니 거기는 맞은편 동네의 정전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반짝거렸다.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 어두운 동네에서 밝은 곳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와 손잡고 있는 내 옆사람조차 서로 다른 세상에 존재한다는 어느 과학자의 말이 실감이 났다.
한 시간쯤 지나서였나. 전기가 다시 들어왔고 나는 바로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때서야 재난 문자가 왔다. 희망 1,2동에 정전이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정전 끝났는데요?
이제와서요? 싶지만 이해하기로 한다. 원룸촌에서는 가끔 이런 일도 있다. 놀라지 마시라. 전기는 언젠가 들어올 것이고, 옆방에는 어둠을 같이 나눌 독립투사 동지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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