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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쏟아낸 빈 공간에는 따뜻한 것들로 채워지기를

by 이신우

IMF 시절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대학교를 휴학하고 1999년 경마장이라는 곳에 왔다. 그리고 2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후보생 2년, 기수생활 10년, 조교사 생활은 14년. 큰 꿈을 안고 시작한 기수 생활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잦은 부상과 체중조절로 몸은 늘 지쳐 있었다. 기수라는 직업은 내가 꿈꾸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수로서의 삶을 끝내고 가까스로 운 좋게도 조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더는 부상과 체중조절로 두려워할 필요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냥 행복했다. 무엇보다 경마장에서 더 이상 올라갈 곳 없는 최고의 직위를 얻게 되었다는 나름의 뿌듯함과 안도감도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 일이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다. 나 역시 그랬다. 기수 때와는 또 다른 형태의 크고 작은 힘듦이 닥쳐왔다. 특히나 여성이 전무하던 곳에 최초의 여성기수가 되어 10여 년의 시간을 보낸 후 여성 조교사로서도 최초, 그것도 홍일점으로 14년째 버텨오고 있다. 그냥 닥치는 대로 열심히 해와서 그런지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중간중간 어려움은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잘해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인지, 또 다른 아픔 때문인지 어린아이의 어리광 같은 수준이 아닌, 정말 경마장을 떠나고 싶다는 고민을 진지하게 할 때가 있다.

동물을 다루는 직업이다 보니 예측하지 못한 사건 사고가 비일비재하고, 그런 직업의 특성 때문인지 약간의 긴장과 불안감은 아무 일이 없는 시간조차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게 된다. 또한 매주 치러지는 경기 성적에 따라 평가받고 대가를 치러야 하는 승부의 세계에서의 멘탈 또한 신이 아닌 이상 버티기 쉽지 않다는 건 조교사라면 누구나 느끼는 점일 것이다.


누구나 한 가지 일을 오래 몰두해서 해오다 보면 번아웃이 오기 마련이다. 나 역시 잘 버텨왔지만 문득 ‘이렇게 지내온 걸 앞으로 또 20년을 더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누군가는 20년이나 남았으니 얼마나 좋냐, 배 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아니다.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감사함을 잠시 미뤄두면, 내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이야기한다.

‘새로운 것을 하고 싶어.’라고.

그러나 지금 당장은 대안이 없다.


내가 하는 일은 늘 불확실성 속에 놓인다. 결과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다. 열심히 한 사람도 아닌 사람도 마찬가지다. 또 좋은 성과에 대해서 칭찬을 받기보다는 안 좋은 성과에 대한 질타를 받을 일이 훨씬 많다. 처음 조교사가 되었을 때는 나름 열정도 가득했고, 무조건 잘해보고자 하는 마음만 있었기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앞만 보며 달렸다. 코로나가 닥쳤을 때쯤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어 도전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 일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는 ‘이 일이 아니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인가?’ 하는 생각이 나를 더 힘들게 한다.


이렇게 내 삶에 나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줄 아무런 대안이 없을 때, 나는 글을 쓴다. 이것이 마지막 지푸라기라는 심정도 있고, 또 이 시간만큼은 나를 힘겹게 만드는 ‘일’이라는 시공간으로부터 벗어나 전혀 다른 세상 속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은 내 안에 들어찬 여러 감정들을 꺼내놓게 한다. 마치 용량이 꽉 찬 메모리 카드처럼 어딘가 비워 놓지 않으면 무엇하나 입력이 될 것 같지 않아 이렇게 쏟아낸다. 앞으로 얼마나 더 긴 시간을 우리는 달려가야 할지 모른다. 그 시간들 속에 힘겹게 다가오는 모든 감정을 꾸역꾸역 내 안에 밀어 넣은 채 갈 수만은 없다. 걸어가다 한 번씩 쏟아내야만 한다. 내 가슴 구석구석에 켜켜이 쌓인 이런저런 감정들을. 그러다 보면 빈 공간이 생기고, 그곳에 또 새로운 것을 쌓게 된다.

하지만 이제는 소원해본다. 내 안에 새로 채워질 것들은 한 뼘이라도 더 행복하고, 신선하고, 재미있고, 따뜻한 것이기를. 슬픔이나 아픔, 상실된 것들, 지루한 것들, 잊어야만 하는 것들보다는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때로는 탈출을 꿈꾸지만, 그 자리에서 결국 버텨내야만 할 때가 많다. 나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글을 쏟아내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 이 시간이 조금씩 커진다면, 새로 맞이할 삶의 조각들이 좀 더 따뜻하리라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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