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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조 Oct 14. 2019

행운을 빌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올해 우리 학교는 중학교 1학년 내내 정기고사를 실시하지 않는 자유 학년제를 운영하고 있다. 시험이 없으면 학습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고 수업을 이끌어 나가기 어려울 것 같아 걱정이 많았는데 이상하리만큼 착한 아이들을 만나 편안한 1년을 보내고 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아이들이 이전보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과목별로 갖가지 활동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조용히 오래 집중하는 능력이 예전보다 부족해진 것도 같다. 그래서 선배들의 시험 기간 즈음에 쪽지 시험을 보았다. 앞으로 반복해서 나올 소설과 희곡 관련 이론을 꼭 정리하고 넘어가라는 의도도 있었다. 필수적인 내용만으로 객관식과 단답형, 서술형을 섞어서 딱 14문제! 시험을 본다고 안내한 후로 스트레스받는 척(?)하며 관심을 보여주는 아이들이 고마웠다. 채점이 끝난 시험지를 돌려주는 날, 한 문제 더 틀렸다고 정기고사처럼 A가 B로 내려가는 것도 아닌데 서로 틀린 문제를 확인하며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아, 이 문제 답 맞았었는데 고쳤다가 틀렸네!"

 "3번 찍을까 하다가 4번 찍었는데 3번이 답이었어!"


 결과가 좋지 않을 때 그 원인을 자신의 노력 부족으로 인식해야 발전이 있다고 교육학에서 배웠는데 현실의 학생들은 운에 돌리는 일이 많다. 예나 지금이나.





 지난 주말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나는 평소보다 더 비몽사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토요일에는 새벽 6시부터 서울 구석구석을 쏘다녔고, 일요일에도 아침 일찍부터 강남 거리를 배회했기 때문이었다. 토요일에는 2만 8천 보를 걸었고 일요일에는 오전 동안에만 만보 넘게 걸었다. 옆에서 내가 정신 못 차리고 졸고 있으니 남편도 더 피곤했나 보다. 웬일로 휴게소에 들어가더니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2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갔다. 겨우 잠에서 깨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다시 출발했다. 


토요일 걸음수 인증샷


 다시 도로로 나왔는데 이상하게 차가 꽉 막혀 있었다. 이 시간에 이 길이 이렇게 밀리는 모습을 처음 봤다. 남편은 남은 콘을 입 속에 넣으면서 이게 무슨 일이냐고 혹시 사고가 난 게 아니냐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10분 정도 더 거북이 운행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율주행차가 필요하다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옆으로 119 구급차와 소방차가 연달아 지나갔다. 어느 순간 다시 차가 뻥 뚫렸다. 도로에 시커먼 잔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내가 처음에 본 건 앞부분이 다 부서진 검은색 그랜저였는데 그 앞으로 멈춰서 있는 차들이 끝도 없었다.


 7중 추돌이었다. 찌그러지고 박살난 차들 옆으로 여러 명의 사람들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휴대폰을 꼭 쥐고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는 여자의 울상이 눈에 들어왔다. 맨 앞에 있는 차가 유난히 많이 부서진 것 같았는데 우리 차가 그 옆을 지날 때 마침 구급 대원이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부서진 차 안의 모습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휴게소에서 조금 덜 잤다면, 오늘은 아이스크림을 사 먹지 말자고 말했었다면, 어쩌면 저 차들 사이에 우리 차가 있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오싹해졌다. 사고는 참 순식간이다. 우리는 휴게소에 갔던 게 운이 좋았다. 아이스크림을 사 먹은 덕분에 사고를 피한 느낌이 들었다. 무사히 집에 도착한 저녁에 뉴스를 보면서 설마 이 사고가 나오려나 생각했는데 보도되지 않은 걸 보니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나 보다. 부디 다친 사람은 없기를. 





 어린 시절 나는 스스로 운이 매우 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중학교 2학년 음악 시간, 선생님이 펴라는 페이지를 찾고 있는데 내 교과서에는 그 페이지가 없었다. 중간에 열 페이지 정도가 누락되어 있는 불량 교과서였다. 학교에서 주는 교과서도 불량일 수도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왜 하필 내 교과서가! 고등학교 2학년 가정 실습을 앞두고 친구들이랑 같이 학교 매점에서 저고리 재료를 구입했다. 실습 첫 시간, 옷감을 뒤집어 놓고 자를 대고 본을 뜨고 있는데 하다 보니 내 옷감만 크기가 작았다. 왜 하필 내 옷감만! 학습지에 필기를 하며 수업을 잘 듣다가 뒤 페이지를 넘기라는 말에 넘겨 보니 내 학습지 뒷면만 텅 비어있었던 날들. 왜 하필 내 학습지만! 수업 시간에 주목받는 걸 정말 싫어했던 나는 이런 거 하나하나 긍정적으로 생각할 여유를 갖고 있지 못했다. 시험 점수가 안 나왔을 때도 다른 공부 방법을 찾아보기보다는 일단 나는 운이 안 좋다고 생각하면서 속상해하기만 했다. 왜 하필 나만 2번을 찍었을까. 왜 하필 나만! 왜 하필, 왜 나만 계속.


 어쩌면 이게 성장의 증거일까. 대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스스로에 대해서,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조금씩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늘 운이 안 좋다는 생각도 접어두기 시작했다. 운이 중요하다고만 생각하기보다는 조금씩 노력해서 운명을 개척해보고 싶어졌다(그렇다고 뭐 그리 열심히 살았던 건 또 아니지만). 모든 걸 '운' 때문이라고 설명하기에는 주위 현상들 중에 인과 관계가 분명한 것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여전히 중학교 때 음악 교과서, 고등학교 때의 저고리 옷감과 뒷면 없는 학습지는 운이 안 좋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지만, 이 당시의 나를 만난다면 지금의 나는 허허 웃으면서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이야기할 것 같다. 나의 어린 시절처럼 조바심 내는 아이들을 차분하게 달래주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참 신기하다.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나. 이런 내가 아이들을 달래줘도 되는 걸까. 그러면서 괜찮다는 말 뒤에는 다음에 더 좋은 일이 생기려고 그러나 보다는 멘트까지 덧붙이곤 한다. 


운 때문이라는 작은 일에도 마구 흔들리는 우리들


 남편은 연애 시절 자신이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 같다는 말을 꽤 많이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말을 들을 만큼 나도 열심이었다. 남편이 눈이 아팠을 때 몰래 가방에 블루베리 음료를 넣어놨고, 연말 선물로는 우리 사진을 넣어 직접 달력을 만들었고, 지갑을 선물할 때는 행운의 2달러와 사이즈 맞춘 우리 사진을 넣어서 함께 주었다. 남편은 나를 만난 게 정말 운이 좋았다고 늘 이야기했고, 나는 거기에 거들어 자기는 나를 만나느라 운을 다 써서 로또 당첨은 안 될 테니 로또를 사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요즘의 남편은 자기가 전생에 죄가 많았던 것 같다는 다른 추측을 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연애 시절 남편이 내게 했던 말들을 상기시켜준다. 당신은 누가 뭐래도 전생에 나라를 구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ㅎㅎㅎ)


 운이라는 게 분명히 있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 운이 비껴가는 건 어쩌면 더 큰 행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음악 교과서, 고등학교 때의 저고리 옷감 같은 걸 20년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까지도 기억할 수 있는 건 참 감사한 일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서의 기억 하나하나가 더 소중하고 애틋해지기 마련이니까.


 운이 따르든 어떻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후회 없이 해보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왕 나의 모든 일에는 운이 좀 따랐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랜만에 혼자 작은 소리로 속삭여 본다. have a good l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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