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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조 May 20. 2020

어른이 된다는 것

어른이자 어린이인 어른이  

 얼마 전에 남편이 회사에서 당직을 서게 되면서 하룻밤을 혼자 보내는 일이 있었다. 평소처럼 퇴근을 해서 배를 채우고 샤워를 하고 뒹굴뒹굴 시간을 보내다가 잘 시간이 됐는데 괜히 아무도 없는 집을 두리번거리게 됐다. 왜 또 자꾸 시간은 궁금한지. 잡생각을 없애기 위해 넷플릭스에 들어가 '코미디' 분야의 영화를 찾아봤다. 혼자 견디기에는 너무 큰 이 적막감을 가벼운 웃음으로 지우고 싶었다. 그래서 보게 된 영화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었는데 전체적으로 내용도 나쁘지 않았고 화면도 알록달록 내 스타일이었지만 마츠코의 일생이 비극적으로 마무리를 맺으니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져 뒤를 돌아보게 됐다. 도대체 이 영화가 왜 코미디인 것이냐!


 영화가 끝나고 다시 시계를 보니 열두 시가 가까워졌다. 어릴 때 가지고 있던 막연한 두려움이 언제 되살아났는지 열두 시가 되면은 귀신이 나타날 것만 같다! 남편이랑 있을 때도 종종 내가 거실 불을 끄고 더 늦게 잠드니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면 된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보아도 왠지 무서웠다. 결국 거실 불을 끄지 않고 안방에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괜히 휴대폰을 봤다가 이불을 뒤집어써보기도 했다가, 침대 맞은편에 있는 옷장을 한 번 열어봐야 하는 건 아닌지, 언젠가 봤던 '숨바꼭질'이라는 영화 장면 하나하나가 생뚱맞게도 너무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도대체 내가 이 나이에 뭐하는 짓이냐! 다음날 아침에 돌아온 남편은 무서워하지 않고 하룻밤을 혼자 잘 보냈냐고 물어본다. 


 "당연하죠. 제가 자취를 얼마나 했는데!"





 그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려 보면 스스로에게도 참 부끄러울 정도다. 누군가가 이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입꼬리 한쪽을 올리고 실컷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조금도 크지 않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나는 참 겁도 많고 엄살도 심하다. 매주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볼 때마다 꼭 한 손으로는 남편 팔을 잡고 있다. 김상중 씨의 '그런데 말입니다'라는 말은 왜 이리 무서운지. 각종 범죄, 귀신, 심지어 고양이까지 무서워하는 나. 


 임용을 한 번 떨어지고 나서 각 지역별 커트라인을 훑어보고는 비교적 점수가 낮은 지역에라도 지원해서 일단 붙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원서를 쓰기 얼마 전 가을, 심한 태풍이 몰아닥친 밤이 있었다. 비바람 소리를 들으며 밤늦게까지 책장을 넘겨보다가 엄마 옆에 베개를 놓고 잠을 청했다. 잠 못 드는 밤 비는 계속 내리는데 엄마는 옆에서 세상모르고 주무셨다. 눈을 멀뚱멀뚱 뜨고 방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런저런 걱정스러운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와장창' 하면서 나무가 쓰러지고 유리창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너무 놀라 주무시는 엄마 팔뚝을 꽉 잡았다. 그 순간 스스로에 대한 깨달음이 떠올랐다. 이렇게 놀랐을 때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옆에 있어야겠다. 꼭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야겠다는 결심이었다. 


 인생이 내 결심대로 흘러갈 리 없었다. 본가에서 두 시간 이상 거리의 학교에 발령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독립을 해야만 했다. 2월 중순에 발령이 나고 2월 28일 이사, 3월 2일 첫 출근이라는 빠듯한 일정이었다. 낯선 동네에 처음으로 나만의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1인 가구의 세대주가 되었다. 20년 넘게 등본을 출력할 때마다 늘 맨 아래에 있던 내 이름이 맨 위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있는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삼일절 오후가 되어 집을 정리해주시던 부모님이 본가로 돌아가시는데 웃는 얼굴로 오른손을 힘껏 흔들고 뒤돌아서니 기다렸다는 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집으로 들어와서는 아직 어색하기만 한, 방 안을 둘러보며 마음껏 울었다. 이제 혼자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과 두려움이었다. 아직 자신이 없는데 어른이 되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숨 막히게 다가왔다. 게다가 다음날부터 이런 내가 선생님까지 해야 한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대학시절에도 부모님이 몇 번을 깨워주셔야만 겨우 일어났던 내가 휴대폰 알람 소리 한 번에 벌떡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누구의 잔소리가 없어도, 깨끗이 씻고 전날 밤 예약해놓은 밥솥을 열어 혼자 아침을 챙겨 먹고 날씨에 맞는 옷을 입고 출근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나보다 훨씬 어린 학생들 앞에서 어른인 척 말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하며 선생님의 신분을 이어갔다. 학년을 걸쳐 수업을 들어간 탓에 매일 같이 두 차시의 수업을 준비하느라 퇴근 후에도 바빴다. 하루의 마무리엔 익숙한 태도로 밥솥을 예약하고 원룸의 불을 다 끄고 잠들었다. 어른의 일상이 막상 시작되고 나니 두려움이니 무서움이니 부담감이니 느낄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무려 약 7년간 씩씩하게 자취를 했다. 주말에 본가에 가면 부모님 앞에서 이전처럼 어리광을 실컷 부리며 혼자 집에 가기 싫다고 징징거리다가도 막상 내 집에 들어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어른이 됐다. 알고 보니 나는 싱크대 하수구 청소나 화장실 청소, 형광등 교체 같은 일도 척척해내는 사람이었다. 학교에 출근하면 나의 어른 레벨은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약간의 두통이나 생리통에도 너무 힘들다고 울먹이며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아이들 앞에 서면 그 누구보다 건강한 어른인 척 연기했다.  





 피터팬 증후군은 심리적인 취약성에 집중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인 상황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독립이 늦어지거나 못하게 된 것이 아니라, 책임지는 상황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어른 아이’에 머물 때 이들을 피터팬이라 부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피터팬 증후군(심리학 용어사전, 2014. 4.)


 키덜트는 유년시절 즐기던 장난감이나 만화, 과자, 의복 등에 향수를 느껴 이를 다시 찾는 20∼30대의 성인계층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의 특징은 무엇보다 진지하고 무거운 것 대신 유치할 정도로 천진난만하고 재미있는 것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키덜트(NEW 경제용어사전, 2006. 4. 7., 미래와경영연구소)


 아주 오래전에 피터팬 증후군이나 키덜트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봤을 때 왠지 나도 그렇게 나이들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역시, 내 이럴 줄 알았다. 아직도 어리광과 엄살이 심하고 유난히도 겁이 많으며 유치한 내 모습을 볼 때마다 막연하게 나는 그 흔하다는 피터팬 증후군, 키덜트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해왔지만 의미를 구체적으로 찾아 읽어보니 마냥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나는 책임감이 그렇게 부족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엄청 유치한 건 사실이지만 진지하고 무거운 것도 조금은 좋아하니까? 


 '어른'의 어원은 '얼다, 얼우다'에서 왔는데 그 뜻은 '정을 통하다'라고 배운 적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된 바에 어원 따위 뭐 중요할까 싶은 생각도 든다. 어른인 척 행동하기도 하고 가끔은 어른이 되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솔직한 마음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고 그러면 어떡하지. 그냥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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